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11편)
11편. 바다가 삼켜버린 고백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내 휴대폰에 은행 어플 알림이 울렸다.
[입금: 1,500,000원 (강병운)]
병운의 월급날이었다. 야간 물류센터에서 뼈 빠지게 박스를 날라 번 돈 중에, 제 월세와 최소한의 생활비만 간신히 남겨두고 모조리 내게 입금한 것이다. 그 우직하고 미련한 숫자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내 카톡 알림이 울렸다.
[형님. 이번 달 돈 보냈수다.]
[아직도 화 많이 나셨수까?]
화면에 뜬 병운의 문자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쳤다.
'화 많이 났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고작 한 층 차이인데, 사과할 거면 당장 뛰어 내려와서 얼굴 보고 변명을 하든 싹싹 빌든 할 것이지, 달랑 텍스트나 보내?'
직접 대면하지 않고 문자로 간을 보는 녀석의 태도에 섭섭함이 배가 되었다. 나는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병운은 그 후로도 이틀 동안 꼬박꼬박 내게 생존 신고 같은 톡을 보냈다.
[좋은 아침입니다.]
[형님 오늘도 고생하십시오!]
[아직 화 많이 나셨슴까?]
말끝마다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는 투박한 문장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액정 위에서 몇 번이나 손가락을 망설였다. 당장이라도 '화 안 났으니까 내려와서 밥이나 먹어, 곰탱아.' 하고 답장을 보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어물쩡 화해해 버리기엔, '치형'이라는 이름이 남긴 잔해가 너무 컸다.
먼저 입을 열면 그날의 침대 위 상황을 내가 먼저 물어봐야 할 텐데, 안 물어보기엔 속이 터질 듯 궁금하면서도, 막상 물어봤다가 녀석이 다시금 예민하게 가시를 세우고 나를 밀어낼까 봐 두려웠다. 내 마음이 이미 녀석에게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버린 탓에, 그 작은 거절 한 번조차 이젠 감당하기 버거웠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비겁한 어른의 길을 택했다. 나는 녀석의 문자를 '읽음' 표시조차 내지 않은 채, 찌질하고 독한 침묵을 이어갔다. 우리 사이의 층간소음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그 와중에 읽고 씹었다는 느낌은 주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신경쓴 것이다. 아니. 읽지도 않았다고 더 마음이 쓰이려나...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병운에게서 다시 톡이 왔다.
[형님 오늘 저 쉬는 날인데 놀러 가도 됩니까?]
화면에 뜬 문장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쳤다. 먼저 찾아와서 정식으로 사과할 기회를 며칠이나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물쩍 넘어가려는 녀석의 태도에 참았던 서운함이 다시금 확 밀려왔다.
물론 녀석 입장에서는 내 얼굴을 직접 보고 사과할 요량으로 용기를 낸 문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내 속은 그 투박한 문장조차 곱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결국 그날도 답장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학원으로 출근해 버렸다. 찌질하고도 찌질하고 참 속이 좁았다.
나는 겨우 그런 인간이었다.
그날 밤.
녹초가 되어 퇴근한 뒤, 넥타이를 풀고 편한 옷으로 갈아 입으려던 참이었다.
딩동.
늦은 시간에 울린 초인종 소리에 나는 이제 그 곰탱이가 내려왔나? 속으로 조금 기뻐하며 동시에 표정 관리를 하면서 인터폰을 확인하니, 화면에는 병운이 아니라 뜻밖의 얼굴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형님, 저 민철입니다."
도어록을 열고 나가자 민철이 뭔가 찌들어있는 표정이지만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아니, 민철이 네가 웬일이야?"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형님, 안에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나는 민철을 거실로 안내하며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내밀었다. 하지만 민철은 차를 가져왔다며 정중히 손사래를 쳤고, 나는 아쉬운 대로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가득 따라서 내주었다.
소파에 마주 앉아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민철이,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형님, 혹시 병운이랑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갑자기 그건 왜?"
"실은 병운이가 무슨 일인지는 끝까지 입을 꾹 닫고 말을 안 하는데요. 요 며칠 아주 죽상을 하고 있어서요. 형님이 자기를 아예 투명 인간 취급하 듯 피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애써 표정을 굳히며 맥주가 든 잔만 만지작거렸다.
"지가 형님한테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긴 한데, 워낙 멍청하고 미련한 놈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서 끙끙대기만 합니다. 형님이 넓은 마음으로 조금만 이해해 주십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꾹꾹 눌러 담았던 섭섭함이 툭 하고 터져 나왔다.
"뭘 이해해? 다짜고짜 형한테 그렇게 핏대 세우고 예민하게 구는 동생 둔 적 없어."
나도 모르게 언성을 살짝 높여 내뱉고 말았다. 속으로는 녀석이 신경 쓰여 미칠 지경이면서, 얄팍한 자존심은 끝내 날 선 가시를 세웠다. 내 반응에 놀란 민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병운이가요? 에이, 그럴 리가요. 그놈이 덩치만 컸지 형님한테 얼마나 깍듯하고 순한 놈인데요. 형님한테 예민하게 굴었을 리가..."
"너도 네 불알친구를 다 아는 건 아니었나 보지 뭐..."
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툭 내뱉자, 거실에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민철은 당황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고, 나는 테이블 위를 무의미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문득, 내 머릿속을 맴돌던 그 지독한 의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병운이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이름. 어쩌면 그의 가장 오래된 친구인 민철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나는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민철아."
"네, 형님."
"너 혹시... 치형이란 사람이 누군지 알아?"
민철은 내 물음에 쥐고 있던 주스 잔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깊은 한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그 이름은... 어떻게 아십니까?"
어딘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순간 불길한 직감이 스쳤다.
"실은 말이지. 제주도 휴가 마지막 날 밤에, 병운이가 잠꼬대로 그 이름을 부르더라."
혹시나 싶어 내 허리를 끌어안고 서럽게 흐느꼈다는 말은 일부러 삼켰다. 하지만 민철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혹시... 그... 울었습니까?"
"어? 응."
내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철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아... 아직도 못 잊었구만, 미련한 새끼..."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형님. 형님은 남자 좋아하는 남자... 그러니까 동성애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쿵, 하고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민철이 내 성 지향성을 눈치챈 건가 싶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능숙하게 대답을 넘겼다.
"그냥, 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나한테 피해 안 주면 뭔들... 각자 알아서 사는 거지."
내 무심한 대답에 민철은 그제야 조금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실은 형님한테 조금 불편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려야 해서 여쭤본 겁니다. 혹시 병운이 이 새끼가, 고등학교 때 유도부에서 저희 괴롭히던 선배 뒤지게 팬 이야기는 했었죠?"
민철의 그 한마디를 시작으로, 내 거실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스물네 살 강병운의 서글프고 치열했던 과거가 한 편의 영화처럼 선명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18년 전 병운의 나이 스무 살.
유도부 영구 퇴출과 강제 전학. 거구의 소년일지라도, 세상을 모르는 모지리가 감당하기엔 세상의 처벌은 가혹했다. 반 죽음이 된 선배의 병원비와 합의금은 평범한 집안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거대했고 충격을 받은 병운은 도망치듯 군대에 입대해 버렸다.
하지만 불행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군 복무 중 들려온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사. 보상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건강이 무너져 내렸다. 집안은 선배의 합의금과 병원비를 막기 위해 이미 무리한 대출까지 끌어다 쓴 상태였다.
전역 후 어떻게든 대학에 가보려던 스물두 살 청년의 알량한 꿈은, 새카만 빚더미 앞에서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결국 병운이 제 삶을 헐값에 팔아넘기듯 향한 곳은 제주의 어느 험한 건설 현장이었다.
안전장비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된 막노동판. 짠내와 땀내만 진동하던 그곳에 병운이 스물네 살이 되던 해, '안치형'이라는 녀석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
"어이구, 저저 곱상하게 자란 새끼 저거. 내가 장담하는데 저 낯짝으로 현장 일? 일주일도 못 버티고 질금 짜면서 도망간다."
현장 인부들의 콧방귀 섞인 조롱대로, 치형은 뙤약볕이 내리쬐는 거친 건설 현장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애였다. 피부는 뽀얗고, 예쁘장하게 생긴 앳된 사내아이. 병운 역시 며칠 앓는 소리를 내다 곧 떠날 아이라 생각하고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치형은 독종이었다.
"하아, 하아..."
퇴근 후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도, 치형은 험한 현장 일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매일 밤 숙소 마당 철봉에 매달려 악착같이 맨몸 운동을 했다. 싹싹하게 눈치껏 선배들의 요령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기어이 일주일을 버티고, 한 달을 버텨냈다.
무엇보다 치형은 그 험한 현장에서 자신과 가장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병운을 유독 맹목적으로 따랐다.
"저리 안 가냐? 다친다. 거치적거리니까 비켜."
"에이, 형! 그러지 말고 이것 좀 어떻게 매는지 가르쳐 줘요. 네? 형!"
병운이 귀찮은 내색을 팍팍 내며 인상을 써도, 치형은 타격감 제로라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곰 같은 병운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형, 밥 먹었어요? 형, 오늘 반장님이 나보고 비계 타는 거 많이 늘었대요!"
쉬는 시간마다 병운의 큰 손에 작디작은 깜찍한 캔커피를 쥐어주며 쫑알거리는 목소리. 살면서 곰살맞은 동생 하나 둬본 적 없던 무뚝뚝한 병운에게, 제 뒤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는 치형의 존재는 팍팍한 일상에 가랑비처럼 스며들었다. 게다가 툭툭 내뱉듯 일을 가르쳐 주면, 다음 날 보란 듯이 야무지게 해내는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병운에게는 뭔가 한 줄기 빛처럼 고단한 하루가 아주 조금은 달콤해졌다.
"야, 인마! 조심해! 거기 발 잘못 디디면 미끄러진다니까. 이리 와,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어느 순간부터 병운은 위험한 작업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치형의 목덜미를 낚아채 제 넓은 등 뒤로 숨기기 시작했다. 투박하고 단단하게 닫혀 있던 병운의 마음에, 뽀얗고 살가운 동생 치형이 완벽하게 자리를 꿰차버린 것이다.
민철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두 사람의 1년은 꽤나 애틋하고 유난스러웠다.
오죽하면 현장 아재들이 농담 삼아 '야, 너네 둘이 사귀냐?' 하고 놀릴 정도로 둘은 아주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고 한다.
치형은 유독 병운을 살뜰히 챙겼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가도, 쉬는 시간이면 치형은 어디선가 꽁꽁 언 얼음물을 구해와 병운의 뜨거운 뺨에 대주며 생글생글 웃었다. 현장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제 식판에 있는 고기반찬을 죄다 병운의 밥 위에 얹어주기 일쑤였다. 그럼 병운은 너나 더 먹으라며 다시 자기 고기까지 덜어주었다.
병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치형이 철근에 살짝 긁혀 손등에서 피라도 나는 날엔, 그 커다란 덩치로 구급상자를 뒤져와 호들갑을 떨었다.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반창고를 붙여주며 "조심 좀 하라니까!" 하고 버럭 화를 내면, 치형은 혼이 나면서도 그게 좋아서 병운의 넓은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매달렸다고 했다.
퇴근길 만원 버스 안에서도 둘의 유난은 눈에 띄었다. 고된 노동에 지친 치형이 병운의 어깨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면, 병운은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치형의 머리가 창문에 부딪힐까 봐 제 커다란 손바닥을 펼쳐 창문과 머리 사이에 푹신하게 대주곤 했다.
치형은 유독 병운과의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크게 웃을 때면 병운의 단단한 팔뚝을 끌어안았고, 조금이라도 술이 들어가는 날엔 그 넓은 등판에 업히려 들었다. 평생 남자들 틈에서 거칠게만 자라온 둔해 빠진 병운은, 그 모든 행동을 그저 '살가운 동생의 유별난 애교' 정도로만 여겼다.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동생이 자기를 친형처럼 졸졸 따르는 게 마냥 예뻐서, 병운은 기꺼이 제 품을 다 내어주고 치형의 체온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렇게 치형과 현장 일을 함께한 지 1년 남짓 되었을 무렵. 대학이다 군대다 하는 핑계로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병운이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인 민철과 재중을 불러낸 술자리에서 치형의 이야기를 처음 꺼냈다고 한다.
"그 자식, 아주 싹싹하고 기특해 죽겠어. 내 자취방에도 자주 놀러 오고, 나도 걔네 집 가서 자주 자는데... 이놈이 혼자자면 못 자는 성격인지 잘 때 날 꼭 껴안고 자. 귀여운 구석이 있지?"
병운은 그저 예쁜 동생 자랑하듯 허허 웃으며 내뱉은 말이었지만, 민철과 재중은 순간 들고 있던 술잔을 멈칫했다. 특히 남동생이 있는 재중은 미간을 팍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미친놈아. 세상천지 어떤 남동생이 다 큰 형 허리를 껴안고 자냐. 징그럽게."
"에이, 동생이 형 좋아서 따르는 건데 뭐 어떠냐."
머쓱해진 병운이 투박한 손으로 뒷머리만 긁적이며 넘겼지만, 민철은 그 상황이 왠지 낯설지 않았다고 했다. 학창 시절부터 유도부 에이스에 체격이 좋았던 병운은 은근히 여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이 미련할 정도로 눈치가 둔해 빠져서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봤는데, 병운 본인도 모르고 주변에서도 잘 몰랐던 또 다른 사실 하나가 있었다. 여자들만큼이나 저 든든하고 다정한 수컷을 남몰래 마음에 품는 '남자'들 또한 이상하게 많았다는 것을.
"야, 혹시 모르잖아. 걔가 동성애자기라도 하지? 그런데 네가 그렇게 껴안고 만져대도 다 내어주다 걔도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면 어떡해? 그럼 너도 나쁜 거야!"
"에이,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걔는 여자 좋아해. 그 누구냐 아이유? 걔 제일 좋아한다더만"
이후에도 민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의를 주었지만, 병운은 "우리 치형이 그런 애 아니다"라며 일축해 버렸다.
하지만 민철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거친 세상에서 유일하게 제게 곁을 내어주고, 땀 흘린 몸을 부대끼며 체온을 나누는 것을 기꺼이 허락한 다정한 형. 게이가 맞았던 치형은 병운이라는 거대하고 무해한 짐승에게 이미 속절없이 깊게 빠져버린 뒤였다.
그리고 어느 가을날.
병운의 자취방에서 단둘이 술을 마시던 치형이, 평소보다 잔뜩 취한 얼굴로 결국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말았다.
"형... 나 형을 지인짜 사랑하는 것 같아."
발음이 꼬인 치형의 고백에, 둔해 빠진 병운은 언제나처럼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유, 짜식. 취했냐? 당연히 형도 우리 치형이 사랑하지."
"아니... 그런 거 말고."
치형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병운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형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그냥 형 동생 말고... 이성적으로."
순간, 병운의 뇌가 완벽하게 정지해 버렸다. 평생 여자만 만나왔고, 남자가 남자를 사랑한다는 개념조차 머릿속에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투박한 사내였다. 놀람과 당혹감, 그리고 형으로서 이 어긋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박이 녀석을 덮쳤다. 병운은 치형의 손을 떼어내며 짐짓 점잖고 단호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치형아, 이러면 안 돼. 어... 이 녀석이 아직 어려서 그런가? 남자를... 그러니까... 어... 그런 식으로 좋아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우리는 우정 아니지 우애깊은? 의리 뭐 그런..."
무슨 말로 설득해야 할 지 몰라 양 손으로 머리를 박박 긁어대던 병운에게 치형은 말했다.
"사랑하는 걸... 사랑하게 돼버린 걸 어떻게 내 마음대로 해요, 형..."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매달리는 치형의 절박함에, 병운은 덜컥 겁이 났다. 이 감정을 지금 당장 끊어내지 않으면 치형이도, 자신도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만 같았다. 치형을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는 알량한 책임감이 결국 가장 잔인한 폭력으로 튀어나갔다.
짜악-
병운의 커다란 손이 치형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고개가 돌아간 치형이 넋이 나간 채 병운을 올려다보았다. 병운은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제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게 될 모진 말을 짐승처럼 토해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새끼야! 또 이딴 더러운 소리 지껄일 거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그것은 치형을 영원히 안 보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이 끔찍한 상황을 멈추고, 다시 예전의 평범한 형 동생으로 돌아가자는 서툰 경고이자 방어기제였다.
하지만 마음을 전부 까뒤집어 보인 치형에게 그 말은 완벽한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치형의 멘탈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다음 날부터 치형은 건설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 이틀 연락을 씹던 치형을 걱정하며 병운이 속을 태우던 3일째 되던 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치형이 우도로 향하는 유람선 갑판에서 차가운 바다로 몸을 던졌다고. 그리고 실종된 지 나흘 만에, 성산일출봉 인근의 인적 드문 해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던 나는 쥐고 있던 유리컵을 놓칠 뻔했다.
성산일출봉. 우도로 가는 유람선 선착장. 며칠 전 제주 오션뷰 카페에서, 그 평화로운 바다를 보며 사색이 되어 냅킨을 찢어발기던 병운의 위태로운 옆얼굴이 내 머릿속을 벼락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치형이 그 아이 장례식장에서 병운이는 사람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민철이 손으로 건조하게 얼굴을 부비며 쓰디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기가 뺨을 때리고, 자기가 모진 말을 해서 그 어린애를 죽였다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미친놈처럼 울부짖었죠. 저랑 재중이가 뜯어말리면서 그랬습니다. 네 탓 아니라고. 멀쩡한 남자 좋아하는 그 녀석 마음이 처음부터 잘못된 거라고. 그렇게라도 해야 이 새끼가 살 것 같았으니까요."
"..."
"근데 평소엔 저희한테 성질 한 번 안 내던 그 착한 놈이, 눈이 뒤집혀서 저희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사람 죽었는데... 지 마음 하나 주체 못 해서 죽은 불쌍한 애한테 어떻게 그딴 식으로 매도하냐고.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뭐 어쟀냐고, 치형이 모욕하지 말라고..."

결국 그날 이후 병운은 삶의 의지를 잃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고 한다.
"그 사정을 아는 건 세상에서 나랑 재중이 딱 둘이었어요. 어쩌면 세상 사람들이 알았다면 모두 치형이의 어긋난 사랑을 안타까워 하기 보단, 왜 함부로 좋아한다 고백을 했을까, 한심하게 생각했겠죠?"
하지만 병운만이 치형의 고백을 '더러운 짓'이라 욕했던 제 입방아를 저주하며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치형이 그렇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운의 어머니도 오랜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후 병운은 정말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 친구들은 병운이 그렇게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 곤란할 법도 했지만, 정작 고등학교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역시 그런 병운을 함부로 버려둘 수 없었다. 그들도 그 때는 정말 죽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금까지 셋은 서로 함께 의지한 것이었다.
나는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민철이 내뱉은 그 끔찍하고도 서글픈 진실들이 내 목을 콱콱 조여오고 있었다.
제주 호텔 침대에서 내 허리를 부서져라 끌어안고 "치형아,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라며 짐승처럼 울부짖던 병운의 눈물.
그 미련하고 다정한 곰탱이는 내가 자신의 등을 쓰다듬어 주던 그 짧은 순간에도, 여전히 스물네 살의 가을밤에 갇힌 채 차가운 바다로 몸을 던진 동생의 환영을 붙잡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철의 이야기가 끝나고, 거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충격과 먹먹함 속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며, 민철이 남은 주스를 들이켜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병운이 이 새끼도 그 인연에 참 깊이 진심이었나 봐요. 형님이랑 제주로 간다길래, 아, 이제는 그 바다의 기억을 잊었나 보다 했는데..."
민철이 툭 던지듯한 말은 묘한 저릿함을 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의리 있는 형 동생 사이의 우정을 넘어, 나라는 존재를 향한 병운의 묵직한 진심과 방향성을 짐작게 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내 가슴을 다시 한번 세차게 후벼 팠다. 나는 마른 입을 축이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 병운이는 어디 있어?"
"실은 오늘 술 먹고 형한테 찾아가겠다 안하무인이 되어가는 거, 제가 간신히 데리고 와서 집에 던져놨어요."
그 튼튼하고 술에 강하던 녀석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셨다는 말에, 내 안에 빳빳하게 서 있던 알량한 자존심의 끈이 툭 하고 끊어져 나갔다.
"내가 잘못했네... 그런지도 모르고."
"형님이요? 아니, 형님이 뭘요."
"내가 그 치형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계속 물어봤거든. 그랬더니 저 녀석이 그렇게 화를 내길래 혼 좀 나봐라고 연락도 안 받고 그랬던 거지. 속 좁게 말야."
상처를 헤집은 건 나였는데, 그것도 모르고 며칠씩이나 어린애처럼 녀석을 피하고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문자를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버리던 내 차가운 태도 앞에서 녀석이 속으로 얼마나 피를 흘렸을지 생각하면 스스로가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자책 섞인 고백에 민철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에이 그래도 동생이 형님한테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죠."
"아냐, 병운이 임마야한테 가 봐야겠어."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민철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에고... 그럼 이야기 잘 나누십쇼.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민철의 얼굴에는, 자신이 해야 할 숙제를 무사히 다 마쳤다는 듯 어딘가 한결 평온해진 기색이 감돌았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는 민철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뒤를 돌아 한 층의 계단을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늘 망설이며 서성거리던 3층, 그 익숙한 현관문 앞.
나는 이번엔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과감하게 도어록 커버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녀석이 내게 제 세상의 문을 열어주며 알려주었던 그 기적의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1, 2, 3, 4, 5, 6, 7, 8.
띠리릭-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어두컴컴한 집 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알코올 냄새와 함께 거실 한가운데 바닥 위에 대자로 뻗어 있는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가장 다정하며, 가장 슬픈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나의 곰탱이.
가슴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녀석의 넓은 어깨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눈물 자국이 말라붙은 녀석의 피곤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억눌린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강병운..."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보는 병운의 얼굴. 실은 너무 보고 싶었던 얼굴. 하지만 큰 상처를 안고 나로인해 또 상처를 입은 그 얼굴.
곤히 잠들어 있지만, 어딘가 슬퍼보이는 그 얼굴을 보며 이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벌컥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형이,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병운아."
보너스샷

20대의 치형과 병운.

만약에 안치형이 살아있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