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2편)
2편. 다리를 저는 들개
출근을 위해 나선 1층 공동 현관. 습관처럼 내 우편함을 기웃거려 보지만, 늘 그렇듯 파리만 날릴 뿐 딱히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유독 301호 우편함만은 토해내기 직전처럼 무언가가 잔뜩 우겨 넣어지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단전 예고 통지서?"
며칠 뒤면 전원 공급을 차단하겠다는 살벌한 붉은 글씨의 독촉장. 찬찬히 들여다보니 지난 2월부터 4월까지 꼬박 3개월 치 요금이 미납된 상태였다. 대단한 액수라도 되면 또 몰라. 16,240원, 15,810원, 16,320원. 그야말로 애교 수준의 소액인데 이깟 전기세조차 낼 형편이 안 된다는 소리 아닌가. 당장 코앞이 여름인데 전기마저 끊겨서 에어컨도 못 켜고 헉헉댈 꼴을 상상하니 실소가 터져 나왔다.
우편함 안쪽 사정도 가관이긴 매한가지였다. 나이스 신용정보, 국세청, 통신사... 굳이 뜯어보지 않아도 시뻘건 압류나 미납 독촉장 일색일 게 뻔한 봉투들이 흉물스럽게 엉켜 있었다.
"어휴, 인생 견적 참 화려하게도 뽑아 놨네."
꼴이 이 지경이니 월세인들 제때 내고 있을 리 만무했다. 피 같은 보증금만 다 까먹고 야반도주하듯 쫓겨나는 건 아닐지 모를 일이다. 나는 도대체 무슨 심보였는지, 홀린 듯 그 고지서 무더기 중 하나를 스윽 뽑아 들어 수신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강병운.'
그 개자식의 이름이구나.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우연으로 내 평화를 앗아간 주범의 석 자를 알게 되다니.
가만, 아까 그 몰골로 대체 어딜 기어 나가는 길이었을까? 어젯밤에도 기어코 새벽 4시까지 쿵쾅거리며 그 난리 부르스를 쳐놓고 지금 나간 거라면, 기껏해야 세 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못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니, 자다 뒤척이는 바람에 귀에 꽂아둔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이 빠져 선잠을 깨버린 내가, 지금 남의 수면 부족 따위를 염려해 줄 처지인가?
"씨발. 길 가다 확 자빠져라."
순간 간밤에 겪은 불면의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조건반사처럼 쌍욕이 튀어나왔다. 하긴, 아까 마주쳤을 때 꼬락서니를 떠올려보면 무릎 튀어나온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차림이 전부였지. 저따위 몰골로 어딜 가서 무슨 생산적인 일을 한단 말인가.
오후 출근길. 익숙한 학원가 골목을 지나 학원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옆 자리 동료 강사가 내 얼굴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정 선생, 오늘 또 안색이 별로. 3층 그 미친놈, 어제도 지랄발광이었어?"
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하루 종일 아이들 오답 노트를 봐줄 생각에 벌써부터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말도 마세요. 어제는 아예 새벽 4시까지 군홧발로 행진을 하더라고요. 그래도 오늘 아침에 집주인 아주머니랑 통화하면서 확실히 다짐받았어요. 8월에 계약 만료되면 얄짤없이 방 빼게 만들 거라고."
"진짜? 아휴, 천만다행이네. 8월까지만 어떻게든 버텨봐."
동료는 주변을 힐끗 살피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근데 정 선생, 웬만하면 그 인간이랑 직접 부딪히진 마. 잃을 거 없는 백수가 제일 무서운 법이야. 보증금 까먹고 월세 밀리는 인간이면 속으론 얼마나 독이 올라 있겠어?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몰라.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동료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잃을 게 없는 자의 막가파식 분노는 애먼 곳으로 튀기 마련이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업 준비를 위해 교재를 펼쳤다.
밤 10시.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학원 문을 나섰다. 유난히 아이들 상대하느라 진이 쏙 빠진 하루였다. 만원 버스에 몸을 싣고 흔들리며 돌아오는 길, 나는 3층의 그 한량 새끼와 내가 사는 세계가 얼마나 다른지 새삼 곱씹었다. 나는 비록 전세일지언정 정당한 노동으로 일궈낸 안락함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빌라 근처 정류장에 내리고 나니, 문득 시원한 캔맥주가 간절해졌다. 씻고 나와서 넷플릭스 켜놓고 마시는 맥주 한 캔. 그것만이 이 빌어먹을 층간소음 지옥에서 버틸 수 있는 유일한 낙이었다.
빌라 앞 골목을 돌아 단골 편의점으로 향하려는 찰나였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원룸 건물 구석에서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당장 돈 내놔, 씨발놈아!"
건장한 사내 셋이 몰려와 누군가를 벽에 밀어붙인 채 멱살을 쥐고 있었다. 엮이면 골치 아프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드러난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봤던 그 늘어난 아디다스 저지. 강병운이었다.
"그 할머니 돈은 내가 어떻게든 다 메꾼다고 했잖아, 씨발놈들아! 다리가 이 모양인데 당장 어디서 돈을 구하고!"
멱살을 잡힌 채로도 병운은 눈을 부라리며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 쿵쾅거리며 내 천장을 부술 듯 걷던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한쪽 다리를 부자연스럽게 절뚝이며 간신히 체중을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우편함에 수북이 쌓여 있던 독촉장들, 그리고 동료 강사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잃을 거 없는 백수가 제일 무서운 법이야.' 하지만 지금 벽에 처박힌 녀석은 무섭다기보단... 바닥까지 내동댕이쳐진 상처 입은 들개 같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냥 무시하고 편의점에 가서 맥주나 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입술을 깨물며 버티는 그 처절한 몰골을, 나는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기요.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는 겁니까! 지금 당장 경찰 부를까요?"
골목을 쩌렁쩌렁 울리는 내 외침에, 멱살을 잡고 있던 사내들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들은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침을 뱉더니, 병운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치며 경고했다.
"오늘은 이쯤 해둔다. 이자 쳐서 원금 다 안 갚으면 다음엔 네 남은 다리 한 짝도 박살 날 줄 알아."
사내들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병운은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나는 괜한 짓을 했나 싶어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원래 목적지였던 편의점으로 들어가 캔맥주 네 캔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에 익숙한 뒤태가 앉아 있었다. 한쪽 다리를 쭉 뻗은 채, 방금 산 듯한 소주병의 뚜껑을 이빨로 거칠게 따고 있는 강병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모른 척 지나가려 했는데, 그가 먼저 탁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이, 2층."
나를 부르는 호칭에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방금 전 바닥에 나뒹굴던 그의 처절한 몰골이 눈에 밟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다가가자, 그는 종이컵 두 개를 꺼내더니 말없이 하나를 내 앞으로 밀었다.
"아깐... 고마웠수다. 한잔할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