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14편)
14편. 여우같은 곰
비좁은 싱글 침대, 천장을 유영하는 가로등 빛을 배경 삼아 병운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녀석은 깍지 낀 내 손을 자기 가슴팍 위에 올린 채, 아주 먼 기억을 길어 올리듯 천천히 입을 뗐다. 그 큰 몸통에서 공명이 일어나는 듯한 따뜻한 병운의 저음이 참 듣기 좋았다.
"형님, 기억나심까? 우리 처음 봤던 날요."
순간 그 때 이성을 놓고 소리를 질러댄 내가 생각나서, 순간 부끄러운 감정이 떠올라 풋 하고 웃으며 병운이의 어깨에 얼굴을 살짝 묻으며 말했다.
"안 날리가? 너랑 네 친구들이 위층에서 하도 쿵쾅거려서, 내가 눈 뒤집혀서 올라갔던 거. 그때 시간이 네 시였어. 진짜 니들이 셋만 아니었어도, 헥토파스칼 킥 날렸을 걸?."
내 대답에 병운이 작게 큭큭거리며 웃었다. 가슴의 진동이 내 손등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때 문 열고 형님을 딱 마주쳤는데, 속으로 그랬수다. '와, 이 사람은 참 맑고 점잖다.' 하고요. 먼지 하나 안 묻을 것 같은 사람이 올라와선 지적인 눈빛을 쏘아대고 언성을 높이는데도, 형님 말투는 뭔가 교양 있어 보였수다... 뭔가 먼지가 날리거나, 담배 쩐내가 나던 곳에 뒹굴던 저한테는 아예 다른 세상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무서운 게 아니라, 그냥 제가 너무 지저분해 보여서 문조차 열어주기 미안했수다."
녀석의 엄지손가락이 내 손등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근데 말입니다. 그렇게 깐깐하게 굴던 형님이, 어느 날인가 제가 빚쟁이들한테 쫓겨서 엉망진창이 됐을 때... 편의점에서 앞으로 궁상떨지 말고 형님 집으로 오라고 했던 거 기억나심까? 형님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가슴이 먹먹했수다. '이 사람은 겉은 차가워 보여도 속은 한없이 무른 사람이구나' 싶었죠."
병운은 잠시 숨을 고르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녀석의 눈동자는 젖은 것처럼 반짝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수다. 다음 날 형님 집에 놀러가고 나서, 단정하게 사는 형님을 보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냥 형님한테 맞추려면 청결해야 할 것 같아서 이태리 타월로 빡빡 밀고, 다우니 잔뜩 먹은 갓 빤 옷을 입고 다녔어요. 형님 집에서 나는 그 방향제 냄새랑 형님 옷에서 나는 세제 향기가 자꾸 생각나고, 퇴근길에 2층 현관문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겁니다. 물론 먼지 가득한 물류 창고에서 뒹구느라 땀에 젖어 도루묵이긴 하지만... 암튼 제가 치형이 일로 워낙 큰 죄를 지었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좋은 형님이 생겨서 다행이다'라고만 생각하려고 애썼수다. 사내놈이 사내놈을 또 좋아한다는 게, 제 팔자에는 가당치도 않은 욕심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요."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더 깊게 가라앉았다. 그 안에는 순박함 속에 감춰두었던, 앙큼하고도 치열했던 녀석만의 짝사랑의 흔적이 묻어났다.

"근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합디다. 욕심 안 부리겠다 다짐해놓고도, 자꾸 형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슬금슬금 여우 짓을 하게 되더라고요. 목욕탕 가서 서로 등 밀어줄 때 기억하심까? 제가 등 내어주고 있을 때, 형님 손이 한 번씩 앞으로 넘어와서 제 가슴 아래쪽이나 배를 스치듯 문지를 때가 있었수다. 그때마다 속으로 얼마나 짜릿하고 미칠 것 같았는지 형님은 모를 겁니다. 형님이 혹시라도 제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 눈치챌까 봐 숨 참느라 혼났수다. 덩치값 못하고 일부러 형님한테 치근덕거리고 어리광 피운 것도 다... 형님이 절 안 내치니까 더 욕심이 나서 부린 앙탈이었수다."
병운의 고백에 나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 무식하게 큰 덩치로 내 품에 파고들던 게 다 고도의 계산이 깔린 여우 짓이었다니. 녀석은 내 손등에 다시금 입술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제주도 별방진에서 둘이 같이 사진 찍을 때도 그랬수다. 제가 슬쩍 뒤에서 형님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 제 품에 쏙 들어오는 형님 온기가 너무 좋았는데... 형님이 밀어내지도 않고 그 다정한 자세 그대로 사진을 찍어주시니까, 진짜 심장이 터져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수다. 사실 그때 제 모습이 날 사랑해주던 치형이 같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치형이가 고백할 때도 이렇게 자신을 받아주고 안아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한 번 던져보고 싶은 용기를 어렵게 냈을 텐데, 그걸 매몰차게 쳐냈던 저란 놈이 감히 형님한테 용기를 내는 건 사치라고 꾹꾹 눌러 담았수다."
나는 녀석의 고백을 들으며, 100kg가 넘는 이 거대한 사내가 내 눈치를 살피며 홀로 삭여왔을 그 무거운 연심의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제주도에서 그 사달이 났을 때... 아침에 눈 뜨고 형님 품에 안겨 있는 저를 발견했을 때,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론 참... 그게 좋았수다. 형님이 저를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나도 이제는 누군가한테 기대도 되는 걸까. 이 다정한 형님 옆이라면, 나도 다시 한번 사람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바를 떤 거예요. 형님 입에서 치형이 이름이 나오니까 너무 놀라서요. 혹시 잠꼬대하며 엉뚱한 소리라도 했을까, 그럼 형님께 치형이에 대해 이야기하면 결국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형님의 생각을 듣게 될 것이고 형님과 모든 게 끝나버리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언성이 높아진 거였수다. 사실은 형님한테 하나도 숨기고 싶은 게 없었어요. 치형이도. 내 과거도."
녀석의 손아귀에 꽉 찬 내 손이 따뜻하게 얽혔다.
"그렇지만... 어제 술 취해서 올라왔을 때, 형님이 저를 안고 잠드신 걸 보면서 확신했수다. 형님 눈에 서린 그 애틋함이, 저랑 똑같은 온도라는 걸요. 아침에 깼을 때 형님이 제 품에 쏙 들어와 자고 있는 걸 보면서... 저는 진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수다. 그래서 일부러 안 깬 척 눈 감고 더 꽉 안아버린 거고요. 솔직히 말하면 착각이래도 이젠 더 숨기고 싶지도 않았어요. 형님이 없었던 그 몇 일이 더 고통스러웠으니까"
병운은 이제야 모든 비밀을 털어놓은 아이처럼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제 눈에는 말입니다. 형님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잘 생기고, 예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십 년, 이십 년 뒤에도 저는 지금처럼 형님 옆에서 밥 해 먹이면서, 형님 눈치 살살 보며 여우 짓 하는 곰탱이로 살 거니까요. 그러니까 절대 저 밀어내지 마십서."
녀석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을 맺었다. 첫 만남의 까칠했던 소음에서 시작된 우리의 인연이, 어느덧 서로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는 가장 고요하고도 뜨거운 안식처에 닿아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의 굵은 팔을 끌어당겨 내 허리에 두르게 했다. 비좁은 싱글 침대 위, 우리는 드디어 서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남은 50년의 미래까지 한데 섞어내며 깊은 여름밤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흐음...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인데? 같이 사는 녀석이 완전 곰이라서 걸을 때마다 쿵쾅거릴 거 아냐."
내가 장난스레 대꾸하자, 병운이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녀석의 굵은 팔이 내 허리를 감싸 안는 감각이 이제는 소름 끼치게 좋았다. 나는 녀석의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조금 전의 농담을 비틀어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런데 말야. 이제 네가 내는 발소리라면 ASMR로 느낄 것 같네."
내 의외의 대답에 병운이 큭큭거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녀석의 낮은 웃음소리가 침대 매트리스를 타고 내 온몸으로 진동하며 전해졌다.
"아이구, 형님. 층간소음 때문에 나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ASMR이라니요. 형님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수다."
"그러게 말이다. 사람 일 참 몰라."
나는 녀석의 품 안에서 살짝 몸을 틀어, 녀석의 시선 끝에 머물렀다. 가로등 불빛이 역광으로 비쳐 녀석의 실루엣이 평소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듬직해 보였다. 나는 녀석의 탄탄한 팔뚝을 타고 내려가 손목을 만지작거리다, 이불 밖으로 삐죽 나와 있는 녀석의 커다란 발을 슬쩍 훑으며 던졌다.
"근데 너... 머리, 어깨, 가슴, 배, 손바닥 거기다 발바닥까지 참 귀엽게 잘생긴 건 알고 있냐?"
"……예?"
병운의 웃음소리가 일순간 멈췄다. 녀석은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눈을 끔벅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형님... 발바닥이라니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사내놈 발바닥이 거기서 거기지...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나는 잠깐 일어나 앉으며 녀석의 다리 한 쪽을 당겨 한쪽 발바닥이 내 쪽에 향하게 했다. 그리곤 손바닥으로 '찹!' 소리가 나게 한 대 치고, 두툼한 발 볼을 꾸욱 눌러보았다. 엄지와 검지 사이가 꽉 차는 게 느껴지는 말도 안되는 두께였고 잔잔한 따스함이 손끝에 전해왔다.
"와... 이 두께좀 봐. 아니 거기서 거기는 무슨. 옆으로 넙떡하니 두툼하고 듬직한 게, 꼭 진짜 곰 발바닥 같네. 발가락도 짧고 통통하니 아주 옹골차게 생겼어. 그러니 걸을 때 소리가 그렇게 웅장했나? 너처럼 큰 덩치를 지탱하느라 고생이 많겠다 싶기도 하고... 암튼 참 귀엽게 잘생겼어."
내 노골적이고도 담백한 관찰평에 병운의 귀끝이 어둠 속에서도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형님은 참... 별걸 다 보십니다. 아, 진짜 쪽팔리게 발바닥은 왜..."
"그냥 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다 좋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발 잘 씻어. 무좀이나 습진 안 걸리게."
병운은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다 장난스레 발가락으로 내 엄지를 꼭 쥐어보였다.
"병운아."
나는 더 깊고 눅진해진 목소리로 녀석을 불렀다. 녀석의 굵은 팔목을 쥔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사실... 처음에는 층간 소음 때문에 눈이 돌아서 네가 제대로 안 보인 것도 사실이거든? 그런데 편의점에서 제대로 봤을 때부터 너라는 놈이 참 사람 미치게 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어."
"...? 제가 형님을 미치게 한다구요?"
"솔직히 네 정도면 남녀를 불문하고 진짜 누구든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완벽한 몸인데다 남자같이 생기기까지 해, 성격까지 좋아. 누가 너한테 안 미치겠어? 나는 사실 네가 내 옆에 있는 것도 좀 판타지 같어."
내 파격적인 고백에 병운의 숨소리가 일순간 멈췄다. 나는 녀석의 당황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녀석의 단단한 가슴팍 위로 내 손바닥을 천천히 가져다 댔다. 병운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저 수염도 좀 있고, 산적같이 안 생겼잖수까. 막... 저 보면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많던데..."
"내 편이 아닐 땐 무섭지, 내 편이면 당연히 좋지 않겠어? 심지어 몸에 문신도 없어. 술을 좀 마셔서 그렇지, 생긴 건 골초인데 담배도 안 펴. 어우 천연기념물. 심지어 게이들 사이에서도 너처럼 덩치 산만하고, 큰 근육에 부드러운 살집도 있으면서 얼굴도 남자답게 생긴 녀석들보고 베어라고 부르면서 그런 쪽만 좋아하는 수요가 꽤 되는데, 솔직히 너 정도면, 거의 환상의 포켓몬 취급 받을 걸? 이 난닝구 안에 털은 어쩌고. 억세게 생겨가지고 부들부들 해."
나는 장난스레 러닝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병운이의 가슴에서 배로 이어진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에이, 말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그 뭐냐. 그래 차 머시깽이. 그래 차은우. 그런 얼굴 좋아하고 몸도 왕자 똬! 있는 그런 조각같은 몸 좋아하지."
"마동석은 그럼 왜 인기가 많은데? 여리여리한 남자들에게 모성본능 느끼는 것과 다르게, 나를 잘 보호해줄 것 같고 가족을 잘 보호할 것 같은 아빠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해. 아니 민철이 말론 너 학창시절에 너 흠모하는 여자애들 많았다더만 몰랐어? 물론 남자애들도."
"저를요? 민철이가 그런 소릴 해요?"
"응 그랬다던데?"
"에이 말도 안됩니다."
"하여튼, 도덕적이고 반듯한 사람인 척 '앞으로 궁상떨지 말고 우리 집으로 와라' 하고 멋진 대사를 날렸지만... 실은 나도 좀 내 안의 짐승 같은 본능과 욕심이 있었던 거야. 이 압도적인 덩치를 내 요새 안에 가둬두고, 나만 보고 싶다는 그런 질 나쁜 욕심 말이야. 물론 나도 네가 이쪽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어. 그래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꾹꾹 눌렀는데, 그냥 알고 지내는 걸로 충분하다고. 살아가다 정말 사람좋은 남자를 만나면, 이게 참 불행하거든. 그 사람이 내 마음을 아는 순간, 정중하게 밀어나면 그나마 양반이지, 대체로 경멸하고 말테니. 근데 이 곰탱이가 말야. 처음 우리 집에 놀러와서 사람 손도 덥석 잡고, 막 덥석 안아보고 말야."
"아, 그날은 진짜 형님에게 진심으로 위로가 되고 싶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들짝 놀라면서 화장실로 뛰어갈 줄 알았수까? 망했는 줄 알았수다"
나는 병운의 턱을 간질이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렇게 바닥에 그렇게 대짜로 뻗어서 평온하게 자고 있었어?"
"헤헤, 술도 많이 마셨고, 좀 피곤했수다 그날은. 그 집은 왜 그렇게 편한 겁니까?"
"뭐 너도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친구들이 귀찮게 해서 수면이 부족했나보다. 너 은근히 잠 많아. 나랑 있으면 잘 뻗더라? 난 솔직히 자다가 떨려서 문득 깨는데."
"아닌데 말입니다. 저도 깨어나서 형님 얼굴 빤히 보다가 잔 적 많아요."
"옴마야. 요놈 보게."
우리 둘은 동시에 피식하며 웃었다.
나는 녀석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킨 채, 마흔 해 동안 숨겨왔던 가장 원초적인 진심을 낮게 속삭였다.
"넌 머리카락부터 발바닥까지, 그냥 존재 자체가 나를 미치게 해. 그러니까 앞으로는 네가 내는 그 묵직한 발자국 소리, 내 귓가에서 평생 들려줘야 한다. 알았어?"
병운은 대답 대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부서질 듯 꽉 끌어안았다. 녀석의 뜨거운 체온과 거대한 골격이 내 온몸을 압박해왔다. 그건 어떤 사랑 고백보다도 강렬한, 이 거대하고 다정한 짐승의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포근하게 끌어안아주는 멋진 남자가 또 있을까?
그러다 갑자기 산통깨는 소리가 들렸다.
"와... 그럼 형님. 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나가서 아무나 다 꼬시고 막 사귈 수도 있는 거였습니까?"
순간, 녀석의 그 해맑고 철없는 질문에 나는 녀석의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거두고, 녀석의 단단한 가슴팍을 검지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래. 아주 잘나셨네. 환상의 포켓몬 강병운씨. 나는 버려두고 내일 당장 문 열고 나가서 실컷 꼬셔 봐라. 아주 줄을 서겠네. 흥이다 흥."

나는 짐짓 토라진 척 몸을 반쯤 돌려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자 내 등 뒤에서 사색이 된 거대한 곰탱이가 펄쩍 뛰듯 놀라며 내 허리를 부서질 듯 꽉 끌어안아왔다.
"아, 아닙니다! 형님! 제가 미쳤수까!"
등 뒤로 녀석의 커다란 가슴팍이 훅 닿아오고, 귓가에는 세상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방금 건 그냥... 내가 그 정도로 형님 맘에 들었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해본 실없는 소리 아닙니까! 저는 진짜 형님밖에 없수다! 평생 형님 발바닥이나 핥으라 해도 좋다고 꼬리 흔들 놈인데, 누굴 꼬시긴 누굴 꼬십니까! 형님, 삐지신 거 아니죠? 예?!"
자신이 파놓은 무덤에 갇혀 안절부절못하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녀석의 꼴을 보니, 삐죽 튀어나왔던 마음이 이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다시 몸을 돌려 녀석의 품에 안겼다.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의 동공이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는 강아지처럼 불쌍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이 농담인 거 알아. 아는데..."
나는 녀석의 두꺼운 뒷목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에휴... 내가 남자라는 존재 자체에 워낙 질리도록 데인 게 많아서 그래."
"데인 거 말입니까? 형님이요?"
"응. 첫번 째는 우리 아버지. 나 어릴 때 다른 여자랑 바람나서 가정을 아주 풍비박산 냈다고 한 거 기억나지? 어머니가 평생 눈물바람으로 사는 걸 보고 자라면서, 내 머릿속엔 '남자라는 족속들은 왜 지들이 짊어진 책임감에 비해 저렇게 한없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일까' 하는 편견이 뼛속까지 박혀 있었어."
내 덤덤한 고백에 병운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내 눈을 응시했다.
"그러다 서른 즈음에, 처음으로 지금 일하는 데랑 비슷한 대형 학원에 들어가고 내 자리가 좀 안정권에 접어들었을 때... 처음으로 마음을 열어볼까 싶었어. 게이들이 많이 간다는 바에 처음 나갔었거든? 눈요기도 되고 재밌길래 퇴근하고 몇 번 나갔더니, 나한테 먼저 좋다고 다가오는 애가 있더라고. 그래서 실은 걔를 사귄 게 처음으로 남자를 만난 거였어."
당시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렸던, 뽀얗고 싹싹했던 얼굴. 평생 연애다운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던 서툰 서른 살의 정민후는, 그 애의 가벼운 호감에 눈이 멀어 제 모든 것을 다 내어주듯 미련하게 굴었었다.
"내가 워낙 서툴렀거든. 나 좋다고 다가온 그 어린애 마음 하나 잡아두겠다고, 만날 때마다 비싼 밥 사 먹이고, 옷이며 향수며 선물 안겨주고... 거의 물량 공세를 하다시피 했어. 걔가 내 유일한 안식처라고 믿었으니까."
"아니 사리에 밝은 형님이... 뭐가 좋아서 그렇게까지 하셨수까?"
내 과거 짧은 연예담에 병운의 목소리에 아주 살짝 심술이 묻어 나는 것 같았다.
"들어봐봐. 알고 보니까... 걔가 데이팅 어플을 돌려가면서 나 같은 호구 놈들 네 명을 더 관리하고 있었던 거야. 나한테 하는 거랑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형뿐이네, 형이 제일 좋다'고 하면서 말이지. 결국 모텔촌에서 다른 남자랑 뒹굴다 나오는 걸 몇 번 목격한 친하게 지내던 또다른 이쪽 동생이 있었던 거야. 보다 못한 이 동생이 그 사실을 알려줘서 알았어. 그 순간에도 이런 불편한 진실을 굳이 알지 않았다면, 그냥 그런 일이 있는지 몰랐다면 그 뒤틀린 안식처에 잘 머물렀을 거라는 생각에, 일름보같다며 그 동생을 원망하다 그 동생하고도 연이 끊어졌지. 생각해보면 그 애는 조상님이 날 수렁에서 건져내려고 보낸 애일 수도 있는데 말야."
그날의 참담함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병운의 미간이 무섭게 일그러지는 게 느끼며 마저 말했다.
"그때 알았어. 아, 아버지고 밖에서 만난 남자고 다 똑같은 것들이구나. 본능에 미쳐서 책임감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리는구나... 남자들의 그 가운데 달린 자지라는 건 발딱거리면 컨트롤이 안 되나 보다. 그 충격으로 나도 남자라지만 남자라는 존재 자체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마음의 문을 철저하게 닫아버렸어. 그게 마흔이 된 지금까지 이어진 거야."
나는 녀석의 잔뜩 굳은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녀석의 얼굴에 서린 분노와 안타까움이 내 손끝으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그래서 말인데, 병운아."
"예, 형님."
"내가 아까 널 '환상의 포켓몬'이니 뭐니 몸뚱이 칭찬만 잔뜩 했지만... 내가 진짜 너한테 속절없이 빠져든 이유는 네 몸 때문이 아니야."
나는 녀석의 까만 눈동자 속으로 시선을 곧게 던져 넣었다.
"친구들을 지키다 학교에서 쫓겨나, 막둥이들 등쳐먹는 사장들 조지다가 그 바닥에서도 쫓겨나. 심지어는 할머니 한 명한테 오지랖부리다가 빚까지 떠안는 널보면서, 바보같고 미련하다 욕하는데 사실 그런 맹목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진짜 원했던 건지도 몰라. 네가 치형이 일로 죄책감에 짓눌려서, 스스로를 벌 주면서까지 평생을 속죄하려 했던 그 미련할 정도의 책임감. 처음엔 그게 너무 바보 같고 답답했는데, 나중엔 알겠더라. 아, 이 남자는 적어도 자기가 품은 사람에 대해서는 죽어도 책임을 지는 사람이구나. 한 번 내어준 마음은 절대 배신하지 않을, 세상에서 제일 듬직한 바보구나, 하고."
내 진심이 담긴 고백에 병운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또 울려 그래. 뚝!"
"뚜욱... 뚝했수다."
"암튼, 나는 네 그 투박한 몸집보다, 네 그 미련한 마음이 너무 좋았어. 평생을 불신하고 살았던 '남자의 책임감'이라는 걸, 네가 내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너한테 속수무책으로 감긴 거야, 이 미련한 곰탱아. 그러니까 다른 남자 꼬신다는 둥 그런 농담 한 번만 더 하면 진짜 확... 꿀밤 먹일거야"
"아이고... 형님..."
내 장난 섞인 경고에, 병운은 끅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무너진 얼굴로 내 목덜미에 푹 고개를 박았다. 그리고 잔뜩 미안하단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내 진짜... 형님 마음도 모르고 입방정 떨어서 죄송합니다. 나 죽을 때까지 형님 옆에서 딱 붙어서, 형님이 지겹다고 발로 차도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책임질 겁니다. 나만 믿어 주십서, 예?"
잔뜩 풀이 죽어 변명하는 녀석의 콧등을, 나는 장난스레 톡 튕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휴, 뭘 그런 걸로 사과까지 해. 나도 네가 그런 사람일 거라고 믿으니까, 모든 걸 다 걸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소리야. 그리고 이 예쁜 몸 어디를 걷어 찰까?"
"형님..."
"나 원래 아무리 친한 친구한테라도, 절대 돈 안 빌려주는 철저한 인간이었어. 근데 네 빚을 갚아준 이유가 뭐겠어. 유세 떨려고 그런 거 아냐. 나한테는 이렇게 마음 내어주는 게, 전 재산 빌려주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구. 그냥...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병운이 너라는 사람을 한 번 완벽하게 믿어보고 싶었어. 네 표정과 목소리는 진실이었거든"
내 담백하고도 따뜻한 고백에, 병운의 입가에 마침내 특유의 커다란 호선이 그려졌다. 녀석은 안도감에 벅찬 듯 씩 웃더니, 커다란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제 품으로 훅 끌어당겼다.
"진짜... 평생 모시겠수다. 형님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드릴게요."
녀석의 넓은 가슴팍에 내 뺨이 온전히 맞닿았다. 방금 전까지 무겁게 가라앉았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고, 비좁은 싱글 침대 위에는 기분 좋은 온기만이 남았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창밖으로 풀벌레 우는 소리만 아스라이 들려오는 고요한 밤.
그런데... 한 5분쯤 지났을까.
방금 전까지는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느라 미처 몰랐는데, 이성적인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찾아오자 갑자기 생경한 감각들이 피부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100kg가 넘는 거대한 사내의 품. 내 다리 사이로 얽혀 들어온 녀석의 굵고 단단한 허벅지. 얇은 여름 러닝셔츠 너머로 훅훅 끼쳐오는 뜨거운 체온과, 내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녀석의 일정한 숨결까지.
'아니... 가만, 우리 지금 너무 딱 붙어있는 거 아닌가?'
누군가와 이렇게 한 침대에서 살을 부대끼며 안고 누워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지금 나와 누워있는 건 진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완벽한 남자 아닌가? 갑자기 머릿속에 '우리가 지금 커플이 되어서 이러고 있다'는 자각이 스치자, 순식간에 얼굴로 열이 확 쏠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녀석의 등허리를 감고 있던 내 두 손이 갈 곳을 잃고 뚝딱거렸다. 내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빨라지는 게 녀석에게까지 전해진 걸까. 나를 안고 있던 병운의 팔에도 일순간 뻣뻣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저기, 병운아."
"예, 예! 형님!"
내가 작게 부르자마자 녀석이 군기 바짝 든 이등병처럼 우렁차게 대답했다. 슬쩍 올려다보니, 어둠 속에서도 녀석의 귀끝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는 게 보였다.
"너... 체온 되게 높다. 좀 안 더워?"
내 말에 병운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안고 있던 팔을 슬그머니 풀었다.
"아! 덥, 덥수까? 형님이 춥다길래, 아니아니 제가 근데 몸에 열이 좀 많아가지고... 형님 불편하십니까? 제가 쪼금 뒤로 물러날까요?"
녀석이 비좁은 침대 끄트머리로 커다란 덩치를 꿈틀꿈틀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하마터면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한 걸, 내가 황급히 녀석의 팔뚝을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아니, 떨어지라는 건 아니고! 침대도 좁은데 어딜 가. 그냥... 좀 덥다고."
"아... 예, 예. 안 가겠수다."
다시금 가까워진 거리. 코끝이 닿을 듯 말 듯 한 위치에서 우리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까의 그 능글맞던 '곰 탈을 쓴 여우'는 온데간데없고, 내 눈앞에는 첫 연애를 시작한 열일곱 살 소년처럼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커다란 순정파 곰탱이 한 마리만 남아있었다.
"크흠..."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입을 맞추거나 더 진한 스킨십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 '내 맘대로 마음껏 보라'며 텐션을 잔뜩 높여놓고는, 막상 멍석이 깔리니 부끄러워서 눈만 끔벅이는 꼴이라니. 마흔 살 정민후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형님..."
"응? 왜."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병운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한 채 녀석의 입술만 쳐다보고 있는데, 녀석이 뜬금없는 소리를 불쑥 내뱉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눈이 참 예쁩니다. 속눈썹도 쪼로록하니 기네요."
"뭐?"
"아, 아니! 그냥 눈이 참 맑으시다고요..."
얼굴이 빨개진 채 헛소리를 늘어놓는 녀석의 순박한 모습에, 나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풋 하고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 진짜 바보같다. 둘 다 덩치는 산만해가지고 쭈뼛거리기는."
"아, 부끄러운 걸 어떡합니까. 형님이 너무 예뻐서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나는 큭큭거리며 녀석의 넓은 가슴팍에 다시 이마를 툭 기댔다.
"그냥 눈 감아. 괜히 오버하지 말고, 오늘은 그냥 이대로 자자. 나 오늘 하루 종일 너무 스펙터클해서 피곤해 죽겠어."
"예. 알겠수다. 그냥 안고만 있겠습니더."
어설프고, 어색하고, 조금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뚝딱거림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자보려고 해도, 얇은 러닝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훅훅 끼쳐오는 이 압도적인 짐승의 체온과 근육의 부피감은 도저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슬며시 눈을 뜨고 녀석의 품에서 고개를 살짝 뒤로 물렸다.
"병운아."
"예, 형님. 안 주무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내 눈앞에 벽처럼 떡 버티고 있는 녀석의 거대한 가슴팍 위로 손바닥을 턱 얹었다. 꾹꾹 눌러봐도 도무지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딴딴한 흉근의 감촉. 나는 기가 막히다는 듯 헛숨을 들이켜며 선전포고하듯 입을 열었다.
"나 이건 오늘 비밀을 풀고 말겠어."
"예? 뭡미까?"
어리둥절해하는 병운을 올려다보며, 나는 주먹을 쥐고 녀석의 딱딱한 가슴을 퍽퍽 때리듯 두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스테리야. 너 유도 끊은 지 20년도 다 돼 가는데, 이 몸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거야?"
"아... 이 몸뚱이요?"
"그래! 아니 이걸... 내가 살아서 만져볼 수 있는 몸이었어? 툭 치면 사람 하나 날아가게 생겼잖아. 너 솔직히 말해봐. 예전에 목욕탕에서 남자들이 너 엄청 우러러보는 거 알고 있었지?"
내 노골적이고도 격한 찬탄에, 병운은 두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들이 절 왜 우러러봅니까. 목욕탕 가면 다들 슬금슬금 피하기 바쁘지. 그리고 남자들이 우러러보는 게 무슨 소용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때 제 온 신경은 제 가슴팍에 부드럽게 스치던 형님 손길에 다 쏠려 있었는데."
녀석은 자신의 두꺼운 팔뚝과 가슴을 대수롭지 않게 쓸어내리며 덧붙였다.
"형님이 아까 그렇게 칭찬을 해주셨지만, 저는 한 번도 제 몸이 좋다고 생각해 본 적 없수다. 그냥 뼈대 굵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유전자가 억울하게 몰빵된 데다가, 평생을 노가다 판에서 쇠파이프 나르고 시멘트 포대 지면서 살다 보니까 그냥 생존용으로 굳어버린 떡대지예. 이게 뭐 멋있는 근육입니까. 그냥 징그럽게 큰 고깃덩어리지."
녀석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가식도 없었다. 이 거구의 사내는, 정말로 자신의 압도적인 피지컬이 가진 위력을 단 한 번도 성적으로 인지해 본 적이 없는 눈치였다.
병운은 멋쩍은 듯 자신의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매만졌다.
"너 진짜 바보냐? 남들은 돈 주고 피티를 수백 번 받아도 못 만드는 몸을 가지고 생존용 떡대라니. 아까 내가 환상의 포켓몬이라고 한 거 진짜 빈말 아니었거든?
나는 녀석의 러닝 셔츠 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며, 빨래판처럼 선명하진 않아도 짐승처럼 두껍고 탄탄하게 잡혀 있는 복근 위를 손가락으로 주욱 훑어 내렸다. 녀석의 배에 일순간 훅 하고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봐봐 뱃살속이 이렇게 두껍고 듬직한데, 만져보면 또 뱃살은 부드럽단 말이지. 그리고 넌 얼굴도 험악한 게 아니라 선이 굵고 남자다운 거야. 턱수염도 까슬까슬하니 섹시하기만 한데."
내 손길과 노골적인 칭찬 폭격에 병운의 귀끝이 다시금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혀, 형님... 자, 자꾸 그러시면 저 진짜 몸 둘 바를 모르겠수다..."
녀석은 내 손을 제지하지도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이 거대한 몸뚱이를 가지고 평생 자신의 매력을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게, 그래서 나라는 인간 하나가 툭 던지는 칭찬에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부끄러워한다는 사실이 묘한 정복욕을 불러일으켰다.
"몸 둘 바를 모르긴. 내 남친 몸 내가 신기해서 좀 만져보겠다는데, 문제 있어?"
내가 한쪽 눈썹을 쓱 올리며 장난스레 묻자, 병운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남친'이라는 단어의 파괴력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했다. 병운은 마치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리더니, 이내 얼굴부터 두꺼운 목덜미까지 용광로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 남... 남친이라하셨수까?"
"왜. 싫어?"
"아, 아니! 싫은 게 아이라...!"
녀석은 당황해서 커다란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평생 나를 깍듯하게 '형님'으로 모시려던 녀석의 머릿속에, 요즘 연인들이나 쓰는 그 간질간질하고 평등한 호칭이 커다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킨 게 분명했다.
"그럼 저, 저도... 형님을 남친이라고 불러야 됩니까? 남친 형님...? 아니면 쟈, 자기야... 라고..."
"푸하하하!"
'남친 형님'이라는 해괴망측한 단어 조합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배를 잡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 거대한 곰탱이가 귀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아휴, 진짜 촌스럽긴. 호칭은 그냥 평소처럼 해. 내가 네 형님인 건 변함없으니까. 너도 손가락 말려가며 다른 호칭 부르기 싫어. 그냥 넌 내 병운이야."
"아... 예, 예. 다행입니더. 자기야는 저도 입 밖으로 꺼내면서 속으로 혀 깨물 뻔했수다."
병운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틈을 타, 나는 아까부터 거슬렸던 녀석의 얇은 면 티셔츠 밑단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아까 찌개 끓이기 전에 젖은 옷을 벗어던지더니, 씻고 나와서 잘 때 되니까 굳이 또 새 티셔츠를 주워 입은 게 내심 못마땅했던 참이었다. 마침 더웠던 나는 일어나며 트레이닝 바지를 벗으며 말했다.
"근데 넌 열도 많아서 덥다면서 잘 때 거추장스럽게 이걸 왜 입고 자. 아까처럼 그냥 벗고 있지."
"아, 그게... 형님 맨살에 닿는데 제 살결이 거칠어서 형님 불편하실까 봐..."
"쓸데없는 소리. 만세 해봐."
"예?"
"벗어봐. 덥다며."

내가 셔츠 밑단을 쥐고 위로 훌쩍 들어 올리자, 녀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아주 고분고분하게 커다란 양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거구의 사내가 좁은 침대 위에서 얌전히 만세를 하고 셔츠를 벗김 당하는 꼴이라니.
천 쪼가리가 녀석의 머리 위로 벗겨져 나가자, 비좁은 침대 위로 녀석의 압도적이고 거대한 맨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도, 녀석의 흉근은 놀라울 정도로 두껍고 묵직한 부피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평생 거친 현장에서 땀 흘리며 단련된, 한 치의 인위적인 느낌도 없는 짐승의 몸.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 위로 굵은 핏줄들이 어깨와 팔뚝을 타고 단단하게 얽혀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녀석의 맨 가슴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옷 위로 만졌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생생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왔다.
"와... 진짜."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대흉근은 내 손바닥 하나로는 다 덮이지도 않을 만큼 넓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아래로 미끄러뜨려, 딱딱한 갈비뼈 위로 짐승처럼 두껍게 잡혀 있는 복근의 굴곡을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체지방 한 점 없는 바짝 마른 근육이 아니라, 묵직한 덩치를 지탱하기 위해 그 위로 얇고 부드러운 살집이 덮인 완벽한 '베어형' 피지컬이었다.
"이러니까 내가 미치지..."
병운이의 바지를 벗겨주면서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노골적인 감상이 튀어나왔다. 하얗고 마른 내 손이 자신의 시커멓고 거대한 가슴과 배 위를 유영하자, 병운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채 온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었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녀석의 단단한 복부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혀, 형님... 그렇게 빤히 보면서 만지시면, 저 진짜... 미칠 것 같수다."
녀석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한층 더 짐승처럼 낮고 거칠게 가라앉아 있었다. 잔뜩 달아오른 녀석의 시선이 내 손의 움직임을 따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는 녀석의 가슴 근육을 장난스럽게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으며, 픽 웃음을 흘렸다.
"왜. 네 몸통이 워낙 커서 내 손이 무슨 애기 손 같고 재밌기만 한데. 부끄러워?"
"부끄러운 게 아이라... 아까 형님이 '이 몸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하셨지 않습니까."
병운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더니, 녀석답지 않게 조금 도발적인 눈빛으로 내 눈을 똑바로 마주쳐왔다.
"저한테 이 몸뚱이가 징그러운 고깃덩어리가 아이라 진짜 '무기'가 될 수 있는 거라면... 그 무기, 형님한테만 제대로 한 번 써봐도 되겠수까."
녀석의 투박하고 뜨거운 손이 내 가슴을 더듬던 내 손목을 덥썩 쥐었다. 그 커다란 손아귀 힘과, 순박한 곰탱이의 얼굴 뒤로 번뜩이는 맹수의 눈빛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평생을 방어적으로 살아왔던 마흔의 요새는, 이미 이 거대하고 다정한 짐승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나는 녀석에게 붙잡힌 손목의 힘을 축 빼버리고는, 자유로운 반대쪽 손을 들어 녀석의 굵은 뒷목을 천천히 감싸 안았다. 짧고 까슬한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빈틈없이 파고들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맘대로 해 봐."
나는 녀석의 뒷머리를 지그시 끌어당기며,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네 그 무시무시한 무기에, 오늘 밤은 아주 꼼짝없이 당해줄 테니까."
내 기꺼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운의 거친 숨결이 내 입술 위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흣...!"
순식간에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였다. 100kg가 넘는 거대한 덩치가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온몸을 덮쳐오자, 비좁은 싱글 침대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찌걱거리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녀석의 입술이 목덜미를 잡아 먹을 듯 집어삼켰다. 처음에는 허기진 짐승처럼 덤벼들던 그 입맞춤은, 이내 내 걷잡을 수 없이 깊고 눅진해졌다. 녀석의 입술 틈새로 뜨겁고 축축한 숨결이 터져 나올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까슬까슬한 턱수염이 내 뺨과 턱선을 거칠게 스치며 짜릿한 마찰열을 일으켰다.
"하아... 형, 형님..."
입술이 잠시 떨어질 때마다 녀석은 앓는 소리를 내며 쇄골, 목덜미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췄다.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투박하고도 노골적인 갈증이었다.
나를 옭아맨 녀석의 커다란 두 손은 내 얇은 면 티셔츠 안으로 불쑥 밀고 들어왔다.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투박한 손바닥이 내 맨 허리와 등줄기를 훑어 올리자,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녀석의 압도적인 덩치에 짓눌려 내 몸이 한없이 작고 무력하게 느껴졌지만, 그 생소한 통제 불능의 감각이 오히려 등골이 휠 만큼 짜릿한 쾌감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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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운아, 잠깐... 숨, 숨 좀..."
내가 헐떡이며 녀석의 단단한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허리를 쥔 손에 부서질 듯 힘을 주며, 제 거대한 흉근을 내 가슴에 빈틈없이 밀착시켜 왔다. 녀석의 뜨거운 맨살과 터질 듯이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안 됩니더. 형님이 분명히... 당해주겠다고 하셨수다."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녀석의 눈동자는 이미 이성이 절반쯤 날아가 있었다. 나는 간신히 엎드려 녀석의 거친 애무를 피했지만 녀석은 내 허리를 받쳐 들고 자신의 허벅지 위로 내 몸을 바짝 끌어올렸다. 하반신이 빈틈없이 맞물리자, 녀석의 크고 묵직한 열기가 여과 없이 전해져왔다.
순박하고 미련하기만 한 줄 알았던 곰탱이가, 작정하고 제 몸뚱이를 '무기'로 들이밀 때의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흔 살 정민후의 얄팍한 여유 따위는 이 거대한 본능 앞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하아... 너 진짜... 미친 곰같아..."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병운은 내 귓가에 입술을 묻고 낮게 그르렁거리듯 웃었다.
"예. 저 형님한테 완전히 미쳤수다. 그러니까 오늘 밤은, 무식한 전직 유도선수가 쓰는 기술 맛이 어떤지 제대로 한 번 겪어 보십서."
녀석의 뜨거운 입술이 다시금 내 목덜미를 집요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가로등 불빛만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은 좁은 방, 오래된 낡은 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두 남자의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눅진한 여름밤의 공기를 빈틈없이 채워가고 있었다.

마지막 화는 아마 16화에서 끝날 것 같아.
둘이 연애 초기의 꽁냥거리는 모습을 만들다보니, 한 장면이 더 오래가는 경향이 생기네?
그래서 15화에서 마지막 화까지 큰 갈등없이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미래를 그리고 싶은 지 꽁냥거리는 모습과 함께 만들어 보려고
오늘은 너무 고정된 장면이 가득한 것 같아서 병운이 남친짤을 좀 쪄봤어.ㅋㅋ

"비싼 커피가 맛있긴 맛있는 것 같수다!(솔직히 뭐가 다른 지 모르겠음)"

"형님 진짜 여기오면 전부 이거 머리에 끼는 거 맞수까? 나만 낀 것 같수다."
"아냐! 잘 어울려. 계속 끼고 있어, 알았지?"

"부산은 처음인데, 여기 진짜 마음에 들었수다. 나중에 자쿠지에서 같이 목욕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