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9편)
9편. 그 해 여름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앞둔 7월의 넷째 주 주말. 나는 습관처럼 차를 몰아 도심 외곽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향했다. 개인적인 휴가 전이면 으레 하루 정도는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를 찾아가 밥 한 끼를 먹고 오는 것이 나의 오랜 의식 같은 거였다.
마당 한구석에 심어둔 옥수수대가 사람 키만큼 훌쩍 자라 있는 낡은 주택. 평상에 앉아 볕을 쬐고 있던 어머니는 내 차 소리에 주름진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피워내셨다.
"뭐 하러 피곤한데 예까지 와. 애들 방학이면 특강인가 뭔가 하느라 밥도 제때 못 챙겨 먹는다면서."
"휴가 가기 전이잖아요. 엄마 얼굴 보고 가야 발걸음이 떨어지지."
어머니가 차려낸 밥상은 언제나처럼 소박하지만 빈틈이 없었다. 보글거리는 된장찌개와 갓 지은 밥 냄새가 훅 끼쳐오자, 며칠 내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올해 휴가는 어디로 간다더냐. 또 집구석에서 에어컨 틀어놓고 책이나 볼 게냐?"
"아니요. 이번엔... 제주도 가려고요."
"제주도? 혼자서?"
"아뇨. 친하게 지내는... 동생 하나랑요. 윗집 사는 친군데, 어쩌다 보니 시간이 맞아서 같이 가기로 했어요."
내 입에서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간다는 말이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숟가락을 들던 어머니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칫했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내 밥그릇 위에 도톰한 계란말이 하나를 얹어주셨다.
"잘됐네. 맨날 혼자 삭히고, 혼자 참아내고... 어릴 때부터 넌 유독 네 세상 안에 담을 높게 치고 살아서 늘 마음이 쓰였는데. 표정도 전보다 한결 살맛 나 보이고."
어머니의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찌개 국물을 넘기다 말고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내 성 지향성에 대해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그렇듯, 그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들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왜 이토록 곁을 내어주지 않고 서글픈 고독을 자처하며 살아왔는지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계셨던 것 같다. 단지 내가 다칠까 봐, 혹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섣불리 들추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셨을 뿐.
"민후야."
"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남들 눈치 보느라, 남들 사는 기준에 억지로 맞추느라 정작 내 속이 곪아 터지는 줄도 모르고 사는 게 제일 미련한 짓이야."
어머니는 마당 너머로 불어오는 눅진한 여름 바람을 맞으며, 낮고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제 나이가 마흔이 넘었잖니."
"에이, 갑자기 무슨 나이 얘기셔요."
"그 나이쯤 되면 외로움도 많이 느낄 때야."
"저는 좀, 유전자가 다른가봐요. 보편적인 인류 유전자가 아닌가봐. 외로운 게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 사람이 어딨어. 넌 어릴 때부터 외로움을 많이 탔어. 내가 알아. 내가 네 엄마니까"
"..."
"네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네가 진짜로 숨통이 트이는 사람. 그게 누구든, 어떤 모양이든 엄마는 상관 안 해. 그러니까 이제는 너도 담장 좀 허물고, 네가 진짜로 편안해지는 사랑을 해라. 남들 보여주기 위한 거 말고, 오롯이 너를 위한 거."
그 은은하고 깊은 당부는 벼락처럼 요란하지 않았지만, 조용한 가랑비처럼 내 마음 가장 깊고 메마른 곳을 흠뻑 적셔왔다. '그게 누구든, 어떤 모양이든.'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내 평생의 비밀과 두려움을, 어머니는 그렇게 가장 에두르고도 따뜻한 방식으로 껴안아 주고 계셨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나는 말없이 밥을 크게 한 숟갈 떠 넣었다. 목이 메어왔다.
병운이 소파에 누워 툭 던졌던 그 서투른 고백 아닌 고백에 겁을 집어먹고, 다시금 높다란 성벽을 쌓아 올리려 했던 나의 비겁함이 어머니의 서정적인 위로 앞에서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 그곳에서 나는 이 묵직하고 다정한 짐승의 진심을, 그리고 내 안의 지독한 욕망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을까.
마당 너머로 짙은 매미 소리가 유독 길게 울려 퍼지는, 7월의 어느 오후였다.
약속의 그
제주공항에 내려 미리 예약해둔 푸른 빛의 렌터카에 몸을 실었다. 서귀포 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자수와 새까만 현무암 돌담이 비로소 섬에 도착했음을 실감 나게 했다.
내가 3박 4일 일정으로 큰맘 먹고 예약한 서귀포의 꽤 이름 있는 고급 호텔은 로비부터 쾌적하고 고요했다. 체크인을 마치고 들어선 디럭스 트윈룸. 넓은 통창 너머로 서귀포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이었다. 하얀 시트가 빳빳하게 깔린 두 개의 싱글 침대가 나란히 놓인 것을 보며,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아주 미세한 서운함을 느꼈다. 짐승 같은 내 욕망에 스스로 튼튼한 목줄을 채우기로 한 마당에 이게 가장 안전하고 맞는 처사였지만 말이다.
"형님, 배고프시죠? 제가 기가 막힌 곳 압니다."
짐을 풀자마자 병운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허름한 갈치조림 식당이었다. 평소 비릿한 생선 조림류는 입에도 대지 않던 나였지만, 병운이 제 커다란 젓가락으로 정성스레 갈치 살만 쏙쏙 발라 내 앞접시에 놓아주자 도저히 젓가락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매콤달콤한 양념이 밴 뽀얀 속살도 맛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를 챙기는 이 곰탱이의 투박한 손길이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달았다.
점심을 든든히 먹고 찾아간 곳은 성산일출봉이 정면으로 보이는 오션뷰 카페였다. 인스타그램을 샅샅이 뒤져 렌터카를 몰고 찾아온 보람이 있게, 세련된 통유리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원하게 들이키며, 제주로 휴가를 떠나는 게 들 떠 학생들과 수업 시간에 나눴던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애들한테 그랬지. 제주도가 원래 설문대 할망이라는 거인 할머니가 치마폭에 흙을 날라서 만든 섬이라는 설화가 있다고. 저기 보이는 저 성산일출봉도 할망이 바느질할 때 등잔대로 쓰려고 세웠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있거든. 고전이라는 게 파고들면 참 재..."
"......"
"병운아?"
신나게 떠들던 나는 문득 말끝을 흐렸다. 병운의 시선은 웅장한 성산일출봉이나 내 얼굴이 아니라, 그 옆으로 잔잔하게 물결치는 바다 너머를 향해 있었다. 하얀 물살을 가르며 어디론가 향하는 유람선 선착장 쪽이었다.
녀석의 커다란 손이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무의식적으로 잘게 찢고 있었다. 멍하니 먼 바다를 응시하는 병운의 옆얼굴은 아침 공항에서 들떠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마치 순식간에 기운이 쑥 빠져버린 사람처럼, 혹은 아주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버린 사람처럼 낯설고 위태로워 보였다.
"강병운. 내 말 안 들려?"
내가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자, 병운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 예, 예. 형님. 설문대 할망이요. 들었수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부쩍 수척해 보였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실내인데도 녀석의 이마엔 식은땀이 살짝 맺혀 있었다.
"어디 안 좋아? 피곤하면 호텔로 먼저 돌아갈까?"
"아닙니다. 그냥..."
병운은 두꺼운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 번 푹 하더니, 테이블 너머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형님. 여기서 멀지 않은데...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 한번 가보실랍니까?"
"어릴 때 살던 곳? 좋지. 어딘데?"
"하도리라고... 조그만 어촌 마을입니다."
병운의 목소리는 평소의 그 씩씩한 울림이 쏙 빠진 채,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곳이 녀석에게 단순한 고향 이상의, 무언가 묵직한 의미를 지닌 곳임을 깨달았다. 지난번 목욕탕에서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말하던 녀석의 그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저 테이블 위에 놓인 자동차 키를 집어 들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보자. 네가 살던 동네는 어떤지 궁금하네."
나는 렌터카의 시동을 다시 걸었다. 하도리로 향하는 길, 창밖의 화려한 관광지 풍경은 점점 소박하고 인적 드문 바닷가 마을로 변해갔고, 조수석에 앉은 병운은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말도 없이 굳은 얼굴로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호텔과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풍경을 뒤로하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하도리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소박한 어촌 마을이었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들과 구불구불한 돌담길, 그리고 짭조름한 바다 냄새.
차에서 내린 병운은 말없이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마을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까만 돌성곽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여기가 별방진이라는 곳입니다. 어릴 때 툭하면 이 성곽 위를 뛰어다니면서 놀았거든요. 육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잘 모르는 데라 조용하고 좋수다."
성곽 위로 올라서자 탁 트인 바다와 조용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땀에 젖은 앞머리를 기분 좋게 흩트렸다. 내 앞서 걷는 병운의 떡 벌어진 등판도 아까 카페에서 보았던 그 위태로운 긴장감이 조금은 풀어진 듯했다.
"경치 진짜 좋네. 바람도 시원하고."
"그렇죠? 근데 조심하십서. 돌이 울퉁불퉁해서 형님 발목 삘라."
병운이 돌아서며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 크고 단단한 손을 잡고 성곽의 평평한 곳으로 올라섰다. 맞닿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체온에 아까의 서운함 따위는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때, 병운이 갑자기 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형님, 저기 성벽 끝에 한 번 서보십서. 제가 제주도 온 기념으로 기가 막히게 인생 사진 하나 찍어드릴 테니까."
"됐어, 남사스럽게 무슨 사진이야. 난 풍경만 눈에 담으면 돼."
"아,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빨리 서보십서, 까만 돌담이랑 형님 하얀 셔츠랑 찰떡일 것 같아서 그럽니다. 하나, 둘, 셋 하면 웃으십서!"
성곽 끝에 어정쩡하게 선 나를 향해, 병운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폰을 들고 이리저리 쭈그려 앉으며 요란을 떨었다. 100kg이 넘는 곰탱이가 좋은 각도 한번 잡아보겠다고 작은 폰 화면에 코를 박고 오리걸음을 하는 꼴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빵 터져버렸다.
"찰칵!"
"자, 보십서! 기가 막히지 않슴까?"
자랑스럽게 폰 화면을 들이미는 병운의 곁으로 다가간 나는, 사진을 보자마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야 이 곰탱아. 별방진 돌담이랑 바다는 다 어디 가고 내 얼굴만 대문짝만하게 찍어놓으면 어떡해! 제주도 바다가 코딱지만 하게 나왔잖아. 여기가 제주도인지 우리 집 앞 목욕탕 앞인지 어떻게 아냐고."
"어... 그런가?"
병운이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진 속에는 눈을 반쯤 감고 빵 터져서 웃고 있는 내 얼굴이 화면의 9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니, 뭐... 제 눈엔 까만 돌덩이들보다 형님 얼굴이 훨씬 번듯하고 보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줌을 당겼나 봅니다."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그 무구한 변명에, 나는 하마터면 헛기침을 할 뻔했다. 이 자식은 꼭 이렇게 아무 의도 없이 사람 속을 뒤집어놓고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든다. 나는 애써 붉어지는 귀 끝을 숨기며 녀석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
"시끄러워. 이리 내놔. 내가 찍는 게 낫겠다."
나는 병운의 폰을 빼앗아 카메라를 셀카 모드로 돌렸다.
"이리 좀 붙어 봐. 같이 찍게."

내 말에 병운이 헤헤 웃으며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좁은 성곽 위라 어깨와 팔뚝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화면 속, 시원한 제주 바다와 까만 별방진 돌담을 배경으로 반듯하게 차려입은 나와 하늘색 셔츠를 입은 병운이 나란히 담겼다.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힌 직후. 화면 속을 들여다보던 병운이 낮게 중얼거렸다.
"여기... 다시 오면 숨 막혀서 죽을 줄 알았는데."
"어? 뭐라고?"
"아, 아닙니다."
병운이 나를 내려다보며, 오늘 제주에 도착한 이후 가장 편안하고 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님이랑 오니까... 막혔던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아서 좋다고요. 진짜 오길 잘했수다."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그의 까만 머리카락 너머로, 투박하지만 다정한 눈빛이 오롯이 나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 오션뷰 카페에서 녀석을 짓누르던 그 무겁고 어두운 그림자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곁에서 완벽하게 걷혀있는 것 같았다.
나는 대답 대신, 맞닿은 그의 단단한 어깨에 내 어깨를 조금 더 깊숙이 기대며 가만히 웃어 보였다.
첫날의 밤은 허무할 정도로 평화롭게 저물었다.
별방진에서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근처 흑돼지 구이집으로 향했다. 두툼한 근고기에 한라산 소주를 각자 두 병씩 비워내고 나니, 하루 종일 쌓인 비행 피로와 운전의 피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방으로 돌아와 대충 샤워만 마치고 각자의 빳빳한 싱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호텔의 밤'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끈적한 긴장감을 의식할 겨를조차 없었다. 눕자마자 옆 침대에서 드르렁거리는 병운의 규칙적인 코골이가 들려왔고, 나는 그 둔탁한 소음을 자장가 삼아 아주 깊고 단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발코니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눈을 떴을 때, 병운은 여전히 이불을 걷어차고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하얀 호텔 시트 위로 무방비하게 드러난 두꺼운 팔뚝과 넓은 등판. 나는 잠시 턱을 괴고 그 우람한 실루엣을 감상하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욕실로 향했다.
"어으... 형님, 벌써 일어나셨수까."
물소리에 깬 병운이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를 하고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 얼른 씻어. 조식 먹고 나가게."
"오늘 일정은 뭡니까? 어제 형님이 바다는 보셨으니까, 오늘은 제가 기가 막힌 데로 모시겠습니다."
"어딘데?"
"비밀입니다! 츄리닝 말고 걷기 편한 바지랑 운동화 신으십서."
든든하게 호텔 조식을 챙겨 먹고 병운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해안도로를 벗어나 한라산 중턱을 향해 굽이진 도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창문을 살짝 내리자, 짭조름한 바다 냄새 대신 서늘하고 짙은 흙냄새가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끝없이 뻗은 삼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사려니숲길'이었다.

"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서늘한 그늘, 코끝을 찔러오는 짙은 피톤치드 향, 그리고 발밑에서 기분 좋게 바스락거리는 붉은 화산송이 흙 길. 어제 오션뷰 카페에서 보았던 화려한 제주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깊고 신비로운 초록의 세계였다.
"바다도 좋지만, 육지 사람들은 이 숲길을 진짜 좋아하더라고요. 형님 학원에만 박혀서 분필 가루 마시는데, 오늘 여기서 허파에 맑은 공기 좀 꽉꽉 채워 가십서."
"병운아..."
"네?"
"너무 좋다. 여기. 짜식. 센스 뭐냐?"
나는 약하게 쥔 주먹으로 사심이 섞어 그의 가슴을 툭 한 대 쳤다. 병운은 그저 가슴을 그 큰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 특유의 입동굴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헤헤"
어제 유람선을 보며 근심이 가득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산의 정기라도 받은 건지,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앞장서서 성큼성큼 숲길을 걷는 뒷모습이 유독 활기차 보였다.
우리는 나란히 붉은 흙길을 걸었다. 평일 오전에 워낙 넓은 숲길이라 주변에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수천 그루의 삼나무들이 마치 외부 세계와 우리 두 사람만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는 거대한 장막 같았다.
"형님, 진짜 조용하고 좋지 않슴까?"
"어, 진짜 좋다. 공기가 달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네."
나는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그때, 길 위로 툭 튀어나온 굵은 나무뿌리를 미처 보지 못하고 발끝이 걸렸다.
"앗?"
순간 몸이 앞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바닥으로 처박히려는 찰나, 옆에서 걷던 병운이 반사적으로 뻗은 굵은 팔이 내 허리를 낚아채듯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어이쿠! 조심하십서, 형님."
순식간에 내 상체가 병운의 탄탄한 가슴팍에 딱 달라붙었다. 녀석의 억센 악력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두 사람의 숨결이 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서늘한 숲 속 공기 사이로, 병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
어제 내 거실에서 넘어졌을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었다. 사방이 고요한 숲속. 나를 품에 안은 채 내려다보는 녀석의 까만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짙고 깊어 보였다.
"거 봐요. 내가 발밑 조심하라고 했슴까, 안 했슴까."
병운이 낮게 웃으며, 나를 안고 있던 팔을 천천히 풀었다. 하지만 그의 커다란 손은 내 허리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내 등에 살포시 얹힌 채 나의 걸음걸이를 맞춰 에스코트하듯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그 육중하고 다정한 손길. 삼나무 잎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녀석에게 들릴까 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 미련한 곰탱이가 나를 완벽하게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서비스샷

"형님, 저 먼저 씻겠수다? 아님 같이 씻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