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10편)
10. 내가 모르는 이름
짧은 트래킹을 마치고 병운의 추천으로 교래리에서 토종닭 백숙을 먹었다. 평소 입 짧은 나를 위해 병운은 큼지막한 닭다리 살을 손수 발라 내 앞접시에 툭 얹어주었다. 푹 고아진 약재 향과 담백한 고기 맛이 숲길을 걸으며 소모된 기운을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환상적인 삼나무 숲이 펼쳐진 비자림로를 달렸다. 병운이 정말 커피가 맛있는 집이라며 안내한 곳은 중산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로스터리 카페였다. 제주 하면 바다만 잔뜩 볼 줄 알았는데, 창밖으로 펼쳐진 독특하고 이국적인 원시림의 풍경에 나는 완전히 넋을 잃었다.
학원 강단 위에서 분필 가루를 마시며 켜켜이 쌓아온 일상의 피로가 피톤치드 향과 진한 커피 향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내 옆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창밖을 구멍이 뚫릴 듯 응시하는 병운의 옆얼굴에도 어제 카페에서의 그 그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섬의 공기가 다시 눅진해질 무렵 우리는 서귀포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횟집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날것의 식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입안에서 미끈하게 감도는 회 특유의 느낌이 늘 낯설었다. 하지만 병운은 제주도에 오기 전부터 "제주도 오면 형님한테 진짜 쫄깃한 자연산 회 맛을 보여주고 싶다"며 몇 번이나 눈을 반짝였었다.
"형님, 진짜 괜찮수까? 회 별로 안 좋아하신다면서 저 때문에 억지로 오신 거 아닙니까?"
병운이 메뉴판을 들고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냐, 여기까지 왔는데 제주도 회 한 번은 먹어줘야지. 너 좋아하는 거니까 실컷 시켜 봐."
내 말에 녀석이 그제야 안심한 듯 "그럼 제가 형님 입맛에 딱 맞을 만한 놈으로 골라보겠수다!" 하며 신나게 주문을 마쳤다.
잠시 후, 정갈하게 썰려 나온 회 한 점을 병운이 정성스럽게 쌈을 싸 내 입 앞까지 들이밀었다.

"형님, 이거 딱 한 번만 드셔보십서. 제가 마늘이랑 쌈장까지 기가 막히게 조합했수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입을 벌려 녀석이 건네는 쌈을 받아먹었다. 평소라면 꺼렸을 식감이었지만,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녀석의 기대에 찬 눈빛, 그리고 내 입안을 꽉 채우는 신선한 맛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어때요, 형님? 맛있죠?"
우물거리는 내 반응을 살피며 조마조마해하는 저 거구의 사내를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트라우마인 제주를 가이드해주고 있는 이 녀석에게, 이 정도 '취향의 양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 생각보다 훨씬 괜찮네. 쫄깃하고 달다."
내 칭찬에 병운이 "그것 보십서! 제가 뭐랬슴까!" 하며 한라산 소주잔을 기분 좋게 부딪쳤다. 밤바다 너머로 어선들의 불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우리는 그렇게 제주의 두 번째 밤을 소주 한 잔과 녀석의 무구한 웃음으로 채워나갔다. 아마 앞으로 나도 회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취기가 기분 좋게 올라올 무렵 우리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각자의 침대에 누웠지만, 어제처럼 바로 잠이 오지는 않았다. 어둠이 깔린 방 안, 창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옆 침대에서 느껴지는 병운의 묵직한 존재감.
이 평화롭고 달콤한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아주 잠시 바랐다.
마지막날엔 낮 비행기로 돌아가야 했기에, 우리는 3일 차 일정을 무리하지 않고 호텔 조식부터, 호텔에 딸려 있는 시설을 즐기다 조금 이른 저녁 호텔로 돌아왔다.
그런데 방 문을 열자마자 꿉꿉한 물 냄새가 확 끼쳐왔다. 천장에 달린 시스템 에어컨에서 물이 새다 못해 아예 뚝뚝 떨어져 카펫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놀라서 프런트에 연락하자, 허겁지겁 달려온 호텔 지배인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지금 바로 방을 바꿔드리겠습니다. 불편을 끼쳐드린 죄송한 마음에, 룸은 저희가 거실이 분리된 스위트룸으로 업그레이드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다만요?"
"현재 남은 스위트룸이 트윈 베드가 아니라, 킹사이즈 침대 하나만 있는 객실뿐이라서요. 혹시 괜찮으실는지..."
지배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내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킹사이즈 침대 하나. 저 100kg이 넘는 거대한 수컷과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고? 내가 대답을 찾지 못하고 굳어있자, 옆에 짐을 들고 서 있던 병운이 호탕하게 웃으며 툭 내뱉었다.
"아유, 다 큰 사내 둘이 자는데 침대 하나면 어떻습니까. 바닥에서 자는 것도 아니고. 괜찮수다! 방이나 빨리 바꿔주십서."
결국 우리는 졸지에 넓은 거실과 아늑한 침실이 딸린 스위트룸으로 짐을 옮겼다. 방 한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광활한 킹사이즈 침대를 보며,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우리는 나가서 먹는 대신 배달 음식으로 회포를 풀기로 했다. 딱새우회와 치킨, 그리고 편의점에서 쓸어 온 캔맥주가 거실 테이블 위에 세팅됐다.
"어우, 덥다. 형님, 저 윗도리 좀 벗고 먹어도 됩니까?"
"어, 뭐. 네 맘대로 해."
병운은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훌렁 벗어 던졌다. 스위트룸의 은은한 조명 아래, 녀석의 떡 벌어진 어깨와 흉통, 굵직하게 갈라진 복근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맥주캔을 들이켰지만, 시선은 자꾸만 그 묵직한 근육의 굴곡을 따라 끈적하게 미끄러졌다. 우리는 제주에서의 3일이 어땠는지, 바다가 어땠고 숲이 어땠는지 시답잖고 평화로운 소회를 나누며 밤이 깊도록 술잔을 부딪쳤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형님, 먼저 누우십서."
양치질을 마치고 침실로 들어온 병운은, 평소 제 자취방에서 자던 버릇 그대로 윗옷을 벗고 트렁크 팬티 한 장만 달랑 입은 상태였다. 넓은 킹사이즈 침대 한쪽에 내가 잔뜩 굳은 채로 눕자, 병운이 반대편으로 조심스레 올라오며 물었다.
"근데 형님, 제가 이러고 자면 좀 불편합니까? 티라도 하나 주워 입을까요?"
"됐어. 사내새끼들끼리 뭘 그런 걸 신경 써. 그냥 자."
입으로는 세상 쿨한 척 내뱉었지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하... 이걸 옆에 두고 어떻게 만지지도 않고 자냐.'
침대가 아무리 넓다 한들, 녀석이 뒤척일 때마다 그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와 짙은 체취가 고스란히 넘어왔다. 내 옆에 눕자마자 "으어, 침대 진짜 좋네." 하며 5분도 안 되어 코를 골기 시작하는 미련한 곰탱이와 달리, 나는 온 신경이 녀석의 맨살에 쏠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성의 목줄을 꽉 틀어쥔 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던, 깊은 새벽이었다.
스윽-
등을 돌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던 내 허리 위로, 갑자기 묵직하고 뜨거운 덩어리 하나가 툭 얹혀왔다. 병운의 굵은 팔이었다.

"...?!"
놀라서 굳어버린 찰나, 병운이 잠결에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오더니 거대한 두 팔로 내 몸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녀석의 뜨거운 맨가슴이 내 등판에 빈틈없이 밀착됐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강병운? 이 자식 깼나? 아니면 잠버릇인가?'
내가 옴달싹달싹 못 하고 숨만 헐떡이는데, 귓가에 닿은 녀석의 숨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불규칙하고, 거칠고, 젖어 있었다.
"흐으... 흑..."
흐느낌이었다. 내 허리를 부서져라 꽉 껴안은 채, 병운이 잠꼬대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강병운?" 하고 작게 부르려던 순간, 녀석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이름 하나가 힘겹게 새어 나왔다.
"...치형아."
"......!"
"치형아... 내가, 내가 잘못했어..."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치형. 그게 누구길래, 이 우직하고 미련한 사내가 꿈속에서조차 이토록 처절하게 매달리고 우는 걸까.
"가지 마... 치형아... 제발..."
나를 껴안은 녀석의 굵은 팔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 얇은 티셔츠 위로 녀석의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져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스러움, 충격,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묘한 질투심이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내 등 뒤에서 짐승처럼 앓으며 무너져 내리는 이 남자의 슬픔이 너무나 거대해서, 나는 이기적인 감정들을 눌러 삼켜야만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여 나를 꽉 안고 있는 녀석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웅크린 채 앓고 있는 병운의 어깨를 밀어 똑바로 눕혔다. 어둠 속에서도 녀석의 뺨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강병운... 괜찮아. 형 아무 데도 안 가."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젖은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리고 가위에라도 눌린 듯 거칠게 오르내리는 녀석의 넓고 단단한 가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천천히, 아주 일정한 박자로 토닥이기 시작했다.
"후우우..."
얼마나 그렇게 토닥였을까. 식은땀을 흘리며 흐느끼던 병운이, 이내 입으로 깊은숨을 후후 내쉬더니 다시금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의 가슴 위에 얹어둔 손을 거두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오래도록 그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치형'이라는 이름의 망령. 이 다정하고 무구한 곰탱이의 가슴속 깊은 곳에 내가 모르는 지독한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서늘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창밖으로 제주 바다의 푸르스름한 새벽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단 한 숨도 자지 못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며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병운을 내려다 보았다. 병운은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은 꿈에도 모르고 세상 평온하게 대자로 뻗은 채 잠들어있었다.

'녀석, 이불이나 똑바로 덮고 자지'
덩치가 너무 커서 침대를 모두 차지하는 병운을 조금 옆으로 옮기고, 거의 침대에 걸쳐있다 시피 누워 간신히 잠일 청했다.
눈을 떴을 때, 스위트룸의 넓은 창으로 제주의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내 옆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고, 구겨진 하얀 시트만이 간밤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거실로 나가자, 이미 샤워를 마친 병운이 소파에 앉아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조금은 피곤해 보이지만 순박한 얼굴. 간밤에 내 등 뒤에서 그토록 서럽게 울던 짐승 같은 사내는 온데간데없었다.
"어, 형님. 일어나셨수까. 제가 미리 짐 좀 싸두고 있었습니다."
병운이 나를 보며 헤헤 웃었다. 그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보는 순간, 새벽 내내 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던 이름 하나가 기어코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강병운. 치형이가 누구야?"
짐을 챙기던 병운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우뚝 멈췄다.
고요한 거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병운의 넓은 등판이 눈에 띄게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녀석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역력했다.
"...예? 치형이라니요? 모, 모르는 이름인데."
녀석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거짓말. 그렇게 처절하게 부르며 울어놓고 모른다니. 나는 답지 않게 욱하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 한 발짝 다가섰다.
"너 어제 새벽에 그 이름 부르면서 펑펑 울었어. 내 허리 부서져라 끌어안고, 가지 말라고 빌면서. 내가 놀라서 땀 닦아주고 달래주기까지 했는데 모른다고?"
내 다그침에 병운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인지, 아니면 감추고 싶은 밑바닥을 들킨 것에 대한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녀석의 짙은 눈썹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아, 모른다고 하지 않았수까!"
쾅, 하고 병운이 들고 있던 옷가지를 여행 가방 안에 거칠게 내던졌다. 처음이었다. 나를 만난 이후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 없던 녀석이,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듯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남의 잠꼬대 가지고 왜 이리 캐묻습니까! 제가 피곤해서 헛소리 좀 했나 보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보는 병운의 눈빛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배신감이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그 구질구질한 밑바닥까지 다 내보여 놓고, 왜 저 이름 하나 앞에서는 이토록 필사적으로 성벽을 치는 걸까.
치형. 남자 이름 같긴 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잊지 못하고 꿈속에서조차 매달리는 존재가 어쩌면 그가 깊이 사랑했던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끈적하고 추악한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나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선생이자 다정한 형의 가면을 억지로 뒤집어썼다.
"...나는 네가 하도 서럽게 울길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돼서 묻는 거잖아. 나한테 말 못 할 비밀이라도 돼?"
내 마지막 회유에도, 병운은 굳게 닫힌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다가, 이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형님은... 몰라도 되는 그런 일이우다! 그러니까 그냥 신경 끄십서."
쿵, 하고 가슴 한구석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형님은 몰라도 되는 일.' 그 한마디는 우리가 제주에서 쌓아 올린 그 모든 은밀하고 다정했던 시간들을 완벽하게 부정하는 선고와도 같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병운을 향해 속절없이 커져 버린 내 마음이, 그에게는 고작 '몰라도 되는' 타인의 영역에 불과하다는 비참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 알았다."
나는 짧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홱 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을 닫고 세면대 앞에 서자, 거울 속에는 상처받은 자존심과 유치한 질투심에 일그러진 마흔 살의 꼴사나운 남자가 서 있었다.
어른답지 못하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친한 동생의 과거일 뿐이라고, 내 알 바 아니라고 쿨하게 넘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머리와 달리 감정은 도무지 통제되지 않았다. 나에게 그토록 예민하고 차갑게 벽을 친 병운이 미웠고, 그깟 이름 하나에 평정심을 잃고 토라져 버린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이 한심했다.
그 시간 이후로, 나는 병운을 향해 완벽하게 입을 닫아버렸다.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렌터카를 반납하고, 제주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나는 녀석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필요한 말은 고갯짓이나 단답으로 일관했고,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도 창밖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의 이 노골적이고 냉랭한 침묵에 가장 안달이 난 건 병운이었다.
"저기... 형님. 커피 한잔 사 올까요?"
"됐어."
"형님, 안전벨트 제가..."
"내가 해."
내가 찬바람이 쌩쌩 불도록 쳐낼 때마다, 병운은 커다란 덩치를 옹송그린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이 아침에 내뱉은 예민한 말이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닫혀버린 내 입을 열게 할 변명거리도 찾지 못한 듯했다.
내내 내 눈치를 살피며 굵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그 무구하고 미련한 옆 얼굴을 의식하면서도, 나는 끝내 고개를 돌려주지 않았다.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 안,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1만 피트 상공의 공기보다 더 차갑고 숨 막히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여름의 한가운데, 우리의 제주는 그렇게 지독한 생채기를 남긴 채 끝이 나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수하물 레일에서 캐리어를 집어 들자마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형님! 같이 가십서, 형님!"

등 뒤에서 당황한 병운이 커다란 보스턴백을 둘러메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침 대기하고 있던 빈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아버렸다. 창밖으로 병운이 거대한 덩치로 허둥지둥 뛰어오는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기사님에게 출발을 재촉했다.
'나이 마흔에 대체 무슨 중학생 같은 짓거리냐, 정민후.'
머릿속으로는 스스로의 유치함에 치가 떨렸지만, 널뛰는 감정은 도무지 이성으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녀석에게 단단히 선을 그인 채 억지로 한 차를 타고 일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짐을 대충 던져두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위층은 고요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녀석은 나와 하루라도 더 제주에 머물기 위해 돌아오는 날 밤부터 곧바로 야간 물류센터 출근 일정을 잡아두었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사정도 모른 채, 어두운 천장을 노려보며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네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놈의 치형인지 뭔지 똑바로 말해줄 때까지 절대 아는 척 안 해.'
나는 억지로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학원 방학 특강 기간이라 평소보다 일찍 오전반 수업을 위해 출근을 서둘렀다. 빌라 공동현관문을 열고 나서는데, 밤새 물류센터에서 땀을 빼고 돌아오는 병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어... 형님!"
피곤에 절어있던 녀석의 얼굴에 아주 잠깐, 반가움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녀석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원래 가려던 방향의 반대쪽 골목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형님..." 하고 부르는 풀 죽은 목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출퇴근길마저 병운과 마주치지 않을 만한 길로 돌아서 다니기 시작했다.
유치찬란한 회피였다.
고구마 슬슬 재배하기 시작해서 미안해.
그래도 오래가지 않을거야.

다음 편 스포일러로.
다음 편에 등장할 병운이 20대 이미지 공개한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