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6편)
6편. 12345678
토요일 아침. 남들이 늦잠을 만끽할 시간에도 내 시계는 무정하게 돌아갔다. 오늘은 오전부터 고등학생 수업이 있는 날이라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이 뜰 수 밖에 없었다.
자는 둥 마는 둥 선잠을 자다 깨서 그런지 뒷목이 뻐근했다. 나는 복잡하게 엉킨 머릿속을 비워내려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 근처 근린공원을 향했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지만, 내 신경은 여전히 위층의 빈방을 서성이고 있었다. '강병운, 이 인간은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그렇게 조깅이라도 할 요량으로 동네 공원 초입에 들어섰을 때였다. 저 멀리 대로변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낯익은, 하지만 유독 지쳐 보이는 거대한 실루엣 하나가 절뚝거리며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병운이었다.
"강병운 씨?"
내 부름에 그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덥수룩한 수염 위로 밤샘 노동의 피로가 짙게 깔린 얼굴. 눈가는 훵하니 패어 있었고, 입술은 하얗게 터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당황한 듯 조끼 주머니에 커다란 손을 찔러 넣었다.
"어... 정 선생... 아니, 형님. 이 이른 아침에 웬일이슈."
"조깅하러 나왔다가... 그 꼴은 뭡니까? 어제 내내 집에 없는 것 같더니."
병운이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손마디는 어제보다 더 거칠게 터져 있었다.
"아, 그게... 친구 놈이 자리를 하나 소개해줘서요. 쿠팡 아시죠? 거기 물류센터요... 어제가 첫 출근이라 새벽 내내 박스 좀 날랐습니다. 돈도 좀 급하고, 가만히 노느니 뭐라도 해야지 싶어서."
"그 다리로 물류센터를요?"
내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높아졌다.
"제 다리가 왜요?"
"그... 약간 그... 영구적으로 안 좋은 그런 거 아녜요?"
그러자 병운이 씩 웃으며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툭툭 쳤다.
"아, 오해하셨네. 저번에 그 빚쟁이 놈들이랑 시비 붙었을 때... 그때 좀 실랑이하다가 삐끗한 거예요. 선수 때 다쳤던 곳이라 좀 오래 가긴 하는데, 이제 제법 괜찮아요. 센터에서도 사정 봐준다고 제자리에서 물건 올리고 내리는 것만 시켜주더라고요."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그가 밤새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차가운 센터 바닥에서 버텼을 시간을 상상하자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당장이라도 지갑을 열어 밀린 전기세며 사채 이자며 다 해결해주고 싶은 충동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그 충동을 억눌렀다.
이 미련한 곰탱이에게, 어줍잖은 금전적 동정은 그의 마지막 남은 우직한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일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거기 있어요. 커피라도 한 잔 사 올 테니까."
"아니, 형님... 괜찮은데..."
나는 병운의 만류를 뒤로하고 근처 카페로 뛰어갔다. 밤샘 노동 뒤에 카페인은 쥐약일 터였다. 나는 내 몫의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병운을 위한 따뜻하고 달콤한 꿀차 한 잔을 주문했다.
공원 벤치로 돌아오자, 병운은 바람막이를 벗어 둔 채 멍하니 아침 햇살을 받고 있었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야생의 짐승처럼, 그의 어깨는 한없이 무겁게 처져 있었다.

"자요. 밤새 일했다면서 커피 마시면 심장 떨릴까 봐 유자 꿀차로 샀으니까."
"아... 고맙수다. 진짜..."
병운이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종이컵을 건네받았다. 그의 커다란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컵이 묘하게 애처로워 보였다. 우리는 벤치 양 끝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나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며, 옆자리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꿀차를 호호 불어 마시는 병운을 훔쳐보았다. 꿀차의 달콤한 향이 차가운 아침 공기 속으로 은은히 퍼져 나갔다.
"맛있네요. 형님은 참... 사람 챙기는 게 보통이 아니슈. 난 그런 거 잘 못 하는데."
병운이 꿀물 한 모금에 노곤해진 듯, 벤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그러자 팽팽하게 당겨진 그의 허벅지 근육과, 옅은 햇살 아래 도드라진 거친 수염 자국이 내 시야를 꽉 채웠다.
"챙기긴 누가... 그냥 층간소음 가해자 잘 케어해서 조용히 좀 살아보려 그러지."
내 냉소적인 대꾸에도 병운은 그저 허허 웃으며 눈을 감았다. 따뜻한 꿀물 기운이 도는지, '허허' 하며 너털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축 내리고 편한 자세로 앉아 보였다. 40년 평생 쌓아온 내 이성이 이 달콤하지만 습한 아침 공기 속에서 맥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나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병운이 건네받은 유자꿀차를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는 걸 지켜봤다. 검은색 츄리닝 바지에 얇은 바람막이를 걸친 차림새였지만, 그 사이로 비치는 떡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가슴팍은 숨겨지지 않았다. 밤샘 노동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그는 연신 차가운 새벽 공기를 들이마시며 열을 식혔다.
"어제 아침엔 왜 그렇게 도망치듯 가버린 겁니까? 사람 무안하게."
내 질문에 병운이 유자 향 가득한 김을 훅 내뱉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형님은 아침 일찍 출근하셔야 하니까요. 저같이 덩치만 큰 놈이 자리 차지하고 있으면 방해만 될 것 같아서... 해장국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는데, 꼴이 이래서 염치없게 그냥 일어났습니다."
"대접은 무슨... 그냥 해장으로 국밥이나 한 그릇 같이 먹고 보내려고 했죠. 그리고 원래 출근 시간이 꽤 늦어요. 아침부터 학교 안 가고 학원 오는 고등학생들 봤어요?"
덧없이 툭 쏘아붙이는 말투로 말해도 병운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러네..." 하더니 그저 기분 좋은 호의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는 다시 유자차를 들이켜더니,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봤다.
"그 돈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내 조심스러운 질문에 병운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금만 2천 좀 안 남았습니다. 사실 처음엔 훨씬 더 많았는데, 모아둔 돈도 여기 붓고 이전 집이 평수는 작아도 나름 전세였는데, 그 보증금도 거기 붓고 이 집으로 이사온 거지. 잡일도 같이 하면서 악착같이 갚았죠."
"얼마 안 남았네. 금방 갚겠어."
"근데 퇴사할 적에 깔끔하게 나가겠다고 사채 쪽에서 당겨 쓴 게 이자가 미친 듯이 불어버리더라고요. 버는 족족 이자로 나가니까... 그래도 요즘은 잠 좀 줄이고 물류센터까지 나가니까, 이자 메우면서 원금도 조금씩 깎고 있습니다."
2천만 원. 누군가에게는 경차 한 대 값일지 모르지만, 다리를 절며 밤샘 노동을 전전하는 이 사내에게는 매일 아침을 짓누르는 바윗덩이와 다름없을 터였다. 제자리에서 물건을 올리고 내리는 단순 업무라지만, 굽혔다 폈다를 반복할 때마다 그 무거운 몸무게를 지탱해야 할 그의 다리가 걱정됐다.
"물류센터는 계속 나가는 겁니까?"
"어제가 첫날이었는데, 다행히 일주일에 네 번 정도는 고정으로 불러준대요. 오늘은 쉬는 날이고요."
병운이 남은 유자차를 털어 넣으며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바람막이가 스르륵 밀려 내려가며 탄탄한 팔뚝이 드러났다.
"근데 형님, 오늘은 수업 일찍 끝납니까?"
"토요일이라 평소보다는 일찍 끝납니다. 5시쯤이면 퇴근하겠네요."
내 대답에 병운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였다.
"그럼 저녁에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고기나 좀 드시겠어요? 어제 신세 진 것도 있고, 형님이 너무 좋은 분 같아서 저도 더 친해지고 싶거든요. 제가 아는 저렴하고 맛있는 뒷고기집이 있거든요."
그는 그저 좋은 이웃을 만나 다행이라는 듯, 순수하게 호의를 담아 웃었다. 자기가 지금 내 거실 바닥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그리고 내 이성을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그 무구함이 오히려 날 더 자극했다.
나는 차가운 아메리카노 얼음을 와득 깨물며, 요동치는 가슴을 억지로 눌렀다.
"고기... 좋죠. 그럼 6시쯤 집 앞에서 봅시다."
"오, 진짜요? 알겠습니다! 제가 형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딱 기다리고 있을게요!"
병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씩씩하게 인사했다.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의 등판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오늘 저녁엔 절대로, 절대로 내 안의 그 끈적한 욕망을 들키지 않겠노라고.
"푹 좀 자둬요."
"예예."
토요일 오후 5시. 대도시의 학원가는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과 퇴근하는 강사에 시내로 놀러나가는 젊은이들까지 얽혀 북새통을 이뤘다. 나는 밀려드는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평소라면 이 불쾌한 신체 접촉과 습한 공기에 진저리를 쳤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 불쾌함이 피부 끝에 와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다.
덜컹거리는 전동차 안,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가방 안에는 무거운 문제지가 가득 들어있었지만, 내 머릿속엔 온통 6시 약속뿐이었다. 스스로에게 수백 번 되뇌었지만, 심장 부근이 간질거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집 근처 약속 장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멀리서부터 낯익은 거대한 실루엣이 보였다. 병운이었다. 그는 아침의 그 꾀죄죄한 바람막이 대신, 깨끗하게 세탁된 듯한 짙은 회색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서 있었다. 짧게 깎은 머리는 아직 덜 말랐는지 물기가 살짝 서려 있었고, 특유의 짙은 수염 자국은 아침 햇살 아래서보다 훨씬 더 야성적으로 보였다.
"형님! 오셨습니까?"
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는 그를 보니, 하루 종일 강의실에서 쏟아부었던 에너지가 순식간에 재충전되는 기분이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방금 씻고 나왔습니다. 자, 가시죠. 여기서 조금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병운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오른쪽 다리를 살짝 절뚝거렸지만, 아침보다는 훨씬 활기찬 걸음걸이였다. 우리는 좁은 골목길을 지나 활기가 넘치는 재래시장 근처로 들어섰다. 병운이 멈춰 선 곳은 '김해 뒷고기'라는 낡은 간판이 걸린 식당이었다. 가게 안은 이미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의 거친 웃음소리와 연기로 꽉 차 있었다.
"김해 뒷고기요? 김해가 뒷고기로 유명한가봐요?"
자리를 잡고 앉으며 내가 묻자, 병운이 젓가락을 세팅하며 씩 웃었다.
"그게 원래 유래가 좀 재밌습니다. 예전에 김해 도축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고기를 손질하다가, 너무 맛있는 부위가 나오면 자기들이 먹으려고 뒤로 몰래 빼돌렸다고 해서 뒷고기라 부른다더라고요. 어머니가 김해 김씨라 어릴 때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해주셨거든요."
"어머니가 김해 분이셨군요. 그럼 병운씨도 김해 출신?"
내 질문에 병운이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전 제주도 놈입니다. 육지 나온 지는 한참 됐는데, 이놈의 입이 고향 말을 잘 안 놔주네요. 말투가 좀 투박해도 이해해주십서."
"아, 제주도..."
그제야 그의 독특한 어투가 이해됐다.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랐을 거구의 사내. 제주도 곰이라니, 왠지 그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수식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운은 집게를 쥐고 능숙하게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좁은 드럼통 테이블 아래로 그의 굵직한 허벅지가 내 다리에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오갔다.
"사실... 빚 갚는 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가끔 맛있는 거 먹으면서 버티는 거죠. 형님 같은 좋은 이웃도 만났으니까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내 앞접시에 놓아주는 그의 손등 위로, 밤샘 노동의 흔적인 미세한 상처들이 보였다.
"원금이 2천이나 된다면서, 이렇게 저한테 이렇게 고기 사 줘도 괜찮습니까?"
"에이, 원금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이니까 이 정도는 저한테 주는 상입니다. 그리고 형님한테 어제 신세 진 게 훨씬 크니까요."
병운은 소주를 잔에 따르며 나를 향해 잔을 건넸다. 불판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안의 은밀한 갈증 때문인지 거실의 공기가 아침과는 다르게 눅진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시끄러운 식당 안의 소음 속에서, 오직 병운의 낮은 목소리만이 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차가운 소주를 들이켜며, 그의 넙대대한 손마디를 훔쳐보았다. 저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던 감촉이 다시금 살아나, 내 이성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했다.
"파산 신청 뭐 그런 방법도 있었을텐데."
"무식해서 뭐 그런 걸 알았어야죠. 제 친구들도 뭐 의리만 있지 똑똑한 놈들은 아니고."
비어있는 병운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자, 내 술잔에도 술을 따르며 말했다.
"형님은 참 좋은 분 같수다. 그 언제지, 밤에 올라와서 문 쾅쾅! 치면서 조용히 좀 살자고 소리 지르셨잖수. 처음엔 좀 무서웠는데, 이렇게 고기도 같이 먹어주시고... 저, 사실 이 동네 와서 친구 말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 나눈 거 형님이 처음입니다."
병운이 살짝 취기가 오른 듯, 멍한 눈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짙은 수염 자국 위로 발그레하게 번진 홍조와, 아침 햇살 아래서 봤던 그 투박한 손마디. 나는 차가운 소주를 다시 한 잔 들이켜며, 그의 넙대대한 손등 위로 불거진 굵은 정맥을 훔쳐보았다.
저 무식할 정도로 선하고 단단한 손에 내 몸이 짓눌린다면. 저 거대한 짐승이 내 고요한 성을 다시 한번 무력하게 헤집어 놓는다면.
"술, 좀 올랐습니까? 얼굴이 빨갛네요."
내 말에 병운이 제 손으로 뺨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웃었다.
"아, 제가 원래 술을 잘 못 하는데... 형님이랑 마시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봅니다. 오늘 진짜 고맙수다, 형님."
그제 일겁병이나 사와서 혼자 다섯병이나 마신 남자가 할 소린가 싶긴 했다. 그는 그저 좋은 이웃을 만나 다행이라는 듯, 순수하게 호의를 담아 웃었다. 자기가 지금 내 눈앞에서 어떤 위험한 욕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그 무구함. 그게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소주잔이 몇 번 오가자, 병운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홍조가 발그레하게 피어올랐다. 그는 큼지막한 손으로 소주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워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제주 바다 사나이였고, 어머니는 김해 시장통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셨수다. 아버지가 육지에 일하러 왔다가 어머니한테 첫눈에 반해서 제주까지 끌고 가셨다더라고요. 제가 이 무식한 덩치를 물려받은 건 아마 그 두 분의 억척스러운 유전자 덕분일 겁니다."
"부모님 금슬이 좋으셨나 봅니다."
"좋았죠. 서로밖에 없었으니까요. 근데 저는...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병운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씹었다. 이 집도 무슨 사연같은 게 있는 것일까? 괜히 이야기가 딥 해 질까봐 소주를 들이켜며 짐짓 무심한 척,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도사린 조바심을 담아 물었다.
"병운씨 정도 피지컬이면 여자들이 가만 안 뒀을 것 같은데. 연애 경험은 좀 있습니까?"
설마 이 인간, 나 같은 쪽인가. 내심 기대 섞인 의심이 고개를 들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예상 궤도를 빗나갔다.
"세 명 정도 만났수다. 3살, 5살 연상 누나 두 명에, 연하 한 명... 전부 노가다판 전전할 때 근처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이었죠. 제가 워낙 무식하게 생겨서 그런지, 이상하게 그런 쪽 여자들이 저를 먼저 찾더라고요."
병운이 소주잔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의 두툼한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근데 말입니다, 형님. 그 사람들은 저라는 사람한테는 별 관심이 없었수다. 그냥... 제 이 덩치랑, 힘쓰는 거. 하룻밤 거칠게 만족시켜 줄 '수컷'이 필요했던 거였죠. 다음 날 아침이면 다들 고맙다느니, 죽다 살아났다느니 하면서도 정작 제 속이 어떤지는 묻지 않았어요."
"......"
"웃기죠? 정작 저는 그 여자들이랑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만족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냥 의무감에 맞춰주고 나면, 제 몸은 여전히 펄펄 끓는데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겁니다. 제가 무슨 기계도 아니고."
충격적이었다. 이 거대한 짐승 같은 육체가, 게이 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상급의 피지컬을 가진 이 남자가, 정작 제대로 된 쾌락의 끝을 본 적이 없다니. 타인의 욕망을 해소해 주는 배설구 정도로만 쓰여왔다는 사실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거칠게 뒤흔들었다.
나는 텅 빈 소주잔을 꽉 쥐었다. 이 무구한 곰탱이를 내 침대 위에 눕혀놓고, 그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는 지독하고 농밀한 쾌락으로 그 거대한 몸을 마비시켜 버리고 싶다는 가학적인 욕정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그래서 이제 연애는 안 하려 합니다. 저같이 징그러운 덩치를 누가 진짜로 좋아해주겠수."
병운이 자조 섞인 말투로 제주 방언을 섞어 내뱉었다. 나는 차가운 소주 대신 그의 넙대대한 손등 위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니, 강병운. 너는 네가 얼마나 탐스러운지 꿈에도 모르는구나.'
식당 안의 소음은 이미 먼 배경음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불판 위에서 타들어 가는 고기 냄새보다, 내 눈앞에서 취기에 젖어 멍하니 앉아 있는 이 수컷의 체취가 훨씬 더 자극적으로 내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 여자들이 멍청했던 겁니다. 병운 씨는... 그런 식으로 소비되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니까."
내 낮은 목소리에 병운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뺨과, 짙은 수염 자국 사이로 살짝 벌어진 입술. 나는 그가 한 번도 맛보지 못한 만족이 무엇인지, 내 손으로 직접 가르쳐주고 싶다는 미친 생각을 하며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아니, 형님. 제가 아깝다니요. 형님처럼 멀끔한 분은 그럼 연애 고수였겠수다?"
병운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레 물었다. 연애 고수라.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쓴 소주를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사실 나는 일찌감치 알았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이 남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하지만 그 깨달음은 해방이 아니라 공포였다. 주변엔 나와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미디어를 통해 본 세상은 홍석천이라는 상징적인 인물 하나가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만약 내가 좀 더 영악했거나 영화라도 즐길 줄 아는 인간이었다면, 작품 속 게이들의 삶을 보며 로망이 앞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지했던 나는 그들의 세계로 나가는 대신, 나를 철저히 감추는 세상을 택했다. 대학교 땐 남들처럼 동기나 알바하며 만난 인연들을 사귀기도 했지만, 내 마음이 닿지 않는 관계는 늘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졌다. 내가 적극적이지 못했던 탓에 그들은 금세 지쳐 떠나갔다.
그러다 정말 이대로 살다간 내가 죽겠다 싶어, 뒤늦게 인터넷 커뮤니티를 뒤지고 술집을 전전했다. 그곳에서 첫사랑이라 믿었던 남자를 만났지만, 그 끝은 비참했다. 10년 전쯤이었나, 동료 강사들과 회식을 마치고 택시를 잡으러 가던 모텔촌, 그 지독한 불빛 아래서 낯선 남자와 나오던 애인을 본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게이이면서 게이를 믿지 못하는, 지독하게 모순적인 괴물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글쎄요. 대학 때 몇 번 사귀어보긴 했는데, 저랑은 잘 안 맞더라고요. 워낙 무뚝뚝해서 그런지 오래 못 갔습니다."
나는 병운에게 내 가슴 속 흉터 대신, 누구나 할 법한 상투적인 과거사를 내밀었다. 그러자 병운이 고기 한 점을 씹으며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형님처럼 인물 좋고 직업도 번듯한 분이 왜 결혼도 안 하고 혼자 사나 했더니... 눈이 너무 높으신 거 아닙니까? 아님 뭐, 혼자 사시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수?"
"그냥 혼자 사는 게 편해서 그럽니다. 옛날처럼 다 결혼하고 애를 낳아라고 강요하는 시대도 아니고, 욜로라고 하잖아요. 내 시간 방해받는 것도 싫고,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속 편해요. 물론 학원 강사가 저출산에 기여하는 건 좀 찔리네."
세상 사람들에게 늘 내놓는 낡은 핑계였다. 하지만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병운의 그 넙대대한 손등으로 향했다. 욜로라는 얄팍한 단어로 포장된 내 고독한 성벽이, 이 순박한 곰탱이의 숨소리 한 번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하긴, 형님처럼 깐깐한 분은 누가 옆에 있으면 피곤하시긴 하겠수다. 그래도 가끔은 외롭지 않으우? 저야 뭐, 이 덩치에 빚까지 있으니 그렇다 쳐도요."
병운이 남은 소주를 털어 넣으며 씩 웃었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과 투박한 사투리. 나를 '형님'이라 부르며 무해하게 웃는 이 남자가, 사실은 내 불신의 벽을 가장 거칠게 허물고 있다는 것을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나는 텅 빈 소주병을 내려다보며, 이 가짜 연극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자문했다. 밤공기는 차가워지는데, 내 안의 눅진한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혼자 고요한 방에서 궁상맞게 자다보면 외로워서 여자라도 찾아 다녀야 하는데, 윗층이 고요할 틈을 줬어야지. 참나."
내 짐짓 섞인 타박에 병운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허허실실 웃음을 터뜨렸다. 불판 위에서 마지막 남은 뒷고기가 바싹 익어가며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허허허, 형님 여자 못 만난 게 이제 내 탓이우?"
"그러니 책임지든가."
"어떻게 책임져드릴까?"
그는 그저 술기운에 던지는 가벼운 농담이라 생각하는지, 무해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 순박한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내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잔에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최대한 무심한 척 덧붙였다.
"나도 여기 생활이 타지 생활이라 친구도 아는 사람도 딱히 없거든. 병운씨 당신이 내 친구 해주면 되겠네."
친구. 게이이지만 게이를 믿지 못하고, 일반 남자들의 다정함에 상처받기 싫어 나를 가뒀던 내가 이 거구의 사내에게 내민 가장 안전하고도 비겁한 손길이었다.
"친구라... 좋수다! 형님 같은 분이 저 같은 놈이랑 친구 해준다는데 제가 영광이죠."
병운이 넙대대한 손을 내밀어 내 어깨를 툭 쳤다. 묵직한 타격감과 함께 전해지는 그의 체온이 닿은 곳마다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그는 자기가 방금 어떤 계약에 사인을 했는지, 그리고 그 '친구'라는 말이 내 안에서 어떤 의미로 비틀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이제 우리 친구인 겁니다? 맞죠?"
그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내 잔을 다시 채웠다. 그게 시작이었다. '친구'라는 면죄부를 얻은 병운은 그 뒤로 눈에 띄게 경계를 풀더니, 평소답지 않게 소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조절이 안 된다며 허허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위험한 예감이 들어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그를 데리고 식당을 나왔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내 앞에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빌라의 가파른 계단이 버티고 있었다. 평소엔 운동 삼아 오르내리던 그 계단이 오늘따라 거대한 절벽처럼 느껴졌다.
"어이, 강병운 씨. 정신 좀 차려봐요. 집에는 가야지."
"아... 형님. 제가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오늘 진짜 기분이 너무 좋아가지고..."
병운이 비틀거리며 내 어깨를 짚었다. 평소에도 절뚝거리던 오른쪽 다리가 술기운에 힘이 풀리자, 그 거대한 몸의 중심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를 팔로 감싸 안으며 버텼다.
"읏...!"
생각보다 훨씬 더 묵직했다. 100kg은 족히 넘을 법한 전직 유도 선수의 체중이 오롯이 내 어깨와 팔에 실렸다. 회색 맨투맨 티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과, 소주 냄새 섞인 눅진한 수컷의 살 냄새가 내 코끝을 무섭게 자극했다.
"형님... 미안하게 됐수. 제가 진짜... 민폐를..."
병운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내 어깨에서 몸을 떼려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오히려 내 목을 더 꽉 끌어안는 꼴이 되었다. 그의 거친 수염 자국이 내 목덜미에 스칠 때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가만히 좀 있어요. 그러다 둘 다 넘어지니까."
나는 그의 허리를 더 단단히 휘어잡았다. 한 손으로는 그의 두툼한 손을 잡아 내 어깨에 두르게 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옆구리를 지탱했다. 걷는 내내 병운의 묵직한 가슴팍이 내 옆구리에 닿아 뭉개졌고,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제가... 원래 이 정도로 꽐라가 되진 않는데... 형님이 너무 좋아서... 친구 생겨서 너무 좋아서... 헤헤."
그는 혀 꼬인 소리로 중얼거리며 내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무게감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대로 집까지 거리가 영원히 줄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고약한 욕심마저 들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절뚝거리며 엉겨 붙어 걷는 두 남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병운은 연신 "미안합니다", "고맙수다"를 연발하며 내 눈치를 살폈지만, 나는 대답 대신 그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 힘을 줄 뿐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집 앞으로 도착했다. 이제 계단이라는 큰 난간이 보인다.
"아... 형님. 제가... 제가 알아서... 으랏차..."
호기롭게 발을 뗐던 병운의 오른쪽 다리가 술기운에 맥없이 꺾였다.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려는 그를 나는 반사적으로 뒤에서 껴안듯 받쳐 들었다.
"읏...! 가만히 좀 있어요, 좀!"
생각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무게였다. 100kg은 족히 넘을 법한 전직 유도 선수의 체중이 내 온몸을 짓눌렀다. 나는 그의 두툼한 팔을 내 목에 감게 하고, 한 손으로는 그의 단단한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커다란 손을 꽉 부여잡았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병운의 거대한 가슴팍이 내 등에 밀착되어 뭉개졌고, 그의 뜨겁고 눅진한 숨결이 내 목덜미를 어지럽혔다. 회색 맨투맨 티셔츠를 뚫고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거의 발열체 수준이었다.
"형님... 진짜 미안하수다... 제가 이 덩치로... 민폐를..."
병운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스스로 몸을 세우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그의 묵직한 허벅지와 엉덩이가 내 몸에 더 노골적으로 비벼졌다. 좁은 계단 참에서 몸이 엉킬 때마다, 그의 짙은 수염 자국이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주 냄새와 뒤섞인 짙은 수컷의 체취가 좁은 계단 공간을 꽉 채웠다.
"미안하면 조용히 하고 발이나 잘 디뎌요. 우리 둘 다 굴러떨어지기 싫으면."
나는 이를 악물고 그의 허리를 더 깊숙이 휘어잡았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그의 육중한 근육들이 내 팔 안에서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땀이 배어 나온 그의 목덜미와, 내 어깨에 툭 기댄 채 "헤헤, 형님..." 하고 중얼거리는 그 무방비한 목소리.
2층 내 집 앞 평상에 겨우 도착했을 때, 내 숨은 이미 턱밑까지 차올랐고 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내 품에 완전히 앵겨서 눈도 못 뜨는 이 거대한 곰탱이를 내려다보며, 나는 갈등했다.
여기서 한 층을 더 올라가 3층 병운의 집까지 갈 것인가, 아니면 이 위험한 짐승을 내 안으로 끌어들일 것인가. 그렇게 2층 복도는 거칠게 몰아쉬는 우리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 이 인간이 또 이런 상태로 우리집에 있으면 내 심장이 터질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체력이 탈탈 털리고 있어서, 이성이 붙잡히는 게 천만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아무튼 내 집 앞을 지나 3층까지 올라오는 길은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100kg에 육박하는 병운의 몸은 시간이 갈수록 더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눌렀디. 우리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좁은 복도를 가득 채웠다. 3층 문 앞에 도착해 그를 벽에 기대세웠다.
"병운 씨, 정신 좀 차려봐요. 문 열어야지. 비밀번호 뭐예요?"
내 다급한 물음에 병운이 감긴 눈을 겨우 치켜뜨며 입술을 달싹였다.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랐는지 발음은 진득하게 뭉개져 있었다.
"일리... 슴... 스으륵... 치프..."
"아니,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해봐요."
내가 그의 뺨을 살짝 톡톡 치자, 병운이 귀찮은 듯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더 명확하게 내뱉었다.
"일휘삼솨... 오륙취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도어록의 덮개를 올리고 1부터 8까지 차례대로 눌렀다. '띠리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나는 허탈한 실소를 터뜨렸다. 미친, 환장이네 정말.
"비밀번호를 무슨 이렇게 해놔요? 보안이라는 걸 몰라?"
"에헤이... 친구들... 술 먹고... 편하게 들어오라고..."
병운은 그 와중에도 친구들 배려한 거라며 헤벌쭉 웃었다. 나는 그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방 안으로 들였다.
문을 열고 마주한 병운의 자취방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썰렁했다. 소파는커녕 제대로 된 의자 하나 없었다. 낡은 벽지와 연결된 작은 부엌, 냉장고와 싱크대, 그리고 옵션으로 딸린 듯한 작은 TV가 전부인 공간. 텅 빈 거실 바닥이 소리를 머금지 못해 걸음마다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기서 그 덩치 큰 사내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떠들었으니, 2층의 내 천장이 울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겠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일단 여기서 좀 자요. 다락까진 도저히 못 올리겠으니까."
복층 위로 매트리스 하나가 보였지만, 지금 내 체력으론 저 좁은 사다리를 타고 그를 올리는 건 자살행위였다. 나는 일단 거실 바닥에 병운을 대충 눕혔다. 계단을 오르며 쏟아낸 땀 때문에 우리 두 사람 모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널브러진 병운을 내려다봤다. 땀에 젖어 살갗에 달라붙은 그의 티셔츠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자긴 집에 가서 씻으면 그만이지만, 이 상태로 병운을 재우면 내일 아침에 감기라도 들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자요. 감기 들겠어."
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티셔츠 밑단을 잡고 올리자, 병운은 잠결에도 고분고분하게 양팔을 들어 올리며 내 손길에 몸을 맡겼다.

티셔츠가 벗겨지고 드러난 그의 상체에, 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미등 아래 드러난 그의 육체는 완벽했다. 넓게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가슴팍,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묵직하고 탄탄한 복부. 구릿빛 피부 위로 땀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만지고 싶다는 욕망이 손끝으로 몰렸다. 하지만 차마 노골적으로 손을 댈 순 없어, 나는 욕실에서 수건을 가져와 미지근한 물에 적셨다.
"아, 땀을 너무 흘려서 좀 닦고 자야 할 것 같아요."

듣는 사람도 없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나는 젖은 수건으로 그의 쇄골부터 천천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수건을 쥔 손에 힘을 빼고, 반대편 손으로 은근하게 그의 가슴 근육을 쓸어내렸다. 묵직하고 탄탄한 촉감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병운이 별 반응 없이 자는 것 같자, 나는 조금 더 대담해졌다. 엄지손가락으로 쇄골 근처의 움푹 팬 곳과 가슴 윗부분을 꾹꾹 누르듯 닦아내며 지독한 갈증을 달랬다.
"움... 끄응."
갑자기 병운의 목구멍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려 했지만, 병운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형님... 뭐 스포츠 마사지 같은 거 배웠수? 시원하네..."
"뭐래는 거야."
"형님. 낙낙~ 낙낙~"
"낙낙 같은 소리하네"
나는 그의 팔뚝을 약하게 찰싹 하고 때렸다.
그는 기분 좋은 듯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띄우며 내 손길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서둘러 베란다 빨래 건조대에 널려 있는 다른 티셔츠 하나를 낚아채 왔다.
"자, 이거 입고 자요. 안 입으면 감기 들라."
내가 티셔츠 구멍에 그의 머리를 밀어 넣으려 하자, 병운은 갑자기 어린애처럼 팔을 버둥거리며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안 입어... 더워요... 나 원래... 아무것도 안 입고 자는데..."
"아니,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더워... 진짜 더워..."
결국 나는 티셔츠 입히기를 단념하고 양말을 벗기고 수건으로 그의 큼지막한 발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다시 만난 그의 거대한 발. 짧고 커다란 발가락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아내고 있는데, 갑자기 병운이 낑낑대며 제 바지춤을 잡고 아래로 내리려 했다.
"어, 어어! 병운 씨, 뭐 하는 거예요!"
"더워... 바지도... 벗을래..."
순식간에 그의 탄탄한 허벅지 라인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면서도, 내 시선은 이미 그의 허리춤을 탐욕스럽게 쫓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조금 긴 호흡을 위해 뼈대를 좀 더 짜보려고 하니
업로드 주기가 늦어져도 이해해주길 바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