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5편)
"형님은 여태 어떻게 사셨수."
내 손을 감싸 쥔 그의 큼지막한 손바닥은 흉기처럼 거칠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갓 마흔을 넘긴 징그러운 사내새끼 둘이서 손을 맞잡고 과거사를 묻는 꼴이라니. 평소의 나였다면 미쳤냐며 당장 손을 뿌리치고 면박을 줬을 것이다.
하지만 알코올 때문인지, 아니면 훅 끼쳐오는 저 수컷의 체취에 마취라도 된 건지. 나는 도무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뜨겁고 묵직한 온기에 기대어, 아주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썩은 내 나는 바닥을 까뒤집어 보여주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나는 애써 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남은 맥주 캔을 비웠다.
"나? 뭐... 흔해 빠진 아침 드라마 쓰레기통 버전이랄까."
"쓰레기통이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중학교 때쯤? 이혼했거든. 어려서 그때는 잘 몰랐는데 아마 어머니 쪽에서 먼저 바람을 폈다나봐. 그래서 양육권이 아버지에게 있었겠지. 나는 아버지가 서먹해서 어머니랑 살고 싶었거든."
"아..."
"그런데 이혼하고 아버지랑 산 지 한 달도 안 되었을까? 그새 아버지가 새 여자를 데려왔는데, 나이는 비슷한 노처녀였어. 급발진스럽게 살림까치 합치고 결국 그 여자랑 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주 뼈 한 마디까지 발라먹는 꽃뱀 출신 술집 마담이었던 거지. 뭔가 괜찮은 게 있다, 투자를 하라 아버지를 보챘을 거야. 뭔진 몰라도 말야. 아주 홀딱 빠져서 우리 집 재산은 물론이고, 친가 할아버지한테까지 손 벌려서 영혼까지 탈탈 털어다 바쳤어."
내 덤덤한 목소리에, 내 손을 쥐고 있던 병운의 굵은 손가락이 흠칫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와중, 나는 입에 맴도는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그 시기 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있던 나는 내 아버지를 낚아챈 그 여자를 질투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늘 아들인 자신에게 무심했지만 어쩌다 한번 쯤은 머리 전체를 감쌀 정도로 큰 아버지의 솥뚜껑같은 손바닥에 설레었다는 것. 그 후 나는 내 정체성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는 것도.
"그 사이 나는 그 여자의 이간질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매일같이 아버지에게 얻어맞았어. 내 여자를 욕했다부터 공부를 손 놓았다고 내 핏줄이 아닐 거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어디서 화가 났는지 몰라도 난 아버지의 샌드백이 되어있었지."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보며 듣고 있는 병운때문에 나도 모르게 너무 나의 어두운 심연을 보여준 것 같아 급히 수습해야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뭐, 복잡한 일들이 더 많긴했는데 쨌든 결국 아버지랑 연을 끊고 어머니에게로 내 발로 걸어나왔어. 배신감. 그래 치를 떠는 배신감이 가둑한 집구석. 결국 여자 하나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는 그 꼴을 본 할머니는 충격받아서 치매가 오셨고, 할아버지는 할머니 수발만 하시다 돌아가셨지. 그렇게 자기 핏줄들 다 시궁창에 처박아놓고, 우리 아버지가 마지막에 어떻게 한 줄 알아?"
"..."
"혼자 조용히 거... 어디더라? 그래 변산. 변산반도로 내려가서 배타고 고기나 잡다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어서 자살했어. 남은 어머니는 충격에 더이상 사람 만나는 것도 질려서, 지금은 저기 시골 구석에 틀어박혀 강아지나 키우면서 살고 계시고."
거실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TV의 백색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나를 쥐고 있는 병운의 투박한 굳은살을 응시했다.
"병운씨, 당신은 친구 구하겠다고 네 인생을 통째로 던졌다며. 나는 말이야, 발정 나서 지 가족들 다 죽인 인간의 핏줄이거든. 그래서 난 당신처럼 앞뒤 안 재고 무식하게 정 주면서 사는 인간들 보면... 진짜 속이 뒤틀려."
말은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지독한 상처와 방어기제를 들키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내 손목을 쥐고 있던 병운의 커다란 손이 스르륵 풀리더니, 곧바로 방향을 틀어 내 어깨를 확 끌어당겼다.
"아...!"

중심을 잃은 내 상체가 쏠리며, 회색 츄리닝을 입은 그의 거대한 품 안으로 그대로 처박히고 말았다. 코끝을 강타하는 짙은 알코올 냄새와 수컷 특유의 땀 냄새. 피죤에 절어서 빨았는가 싶은 섬유유연제 냄새에 섞인 그의 톡 쏘는 체취. 짐승의 털가죽처럼 거친 까만 반팔 티셔츠 너머로, 그의 뜨거운 대흉근이 내 뺨에 날것 그대로 닿아왔다.
"무식하게 정 줘서 미안한데."
내 귓가에 울리는 병운의 목소리는 낮고, 무겁고, 빌어먹을 정도로 다정했다.
"형님은 속 뒤틀려도, 난 형님 얘기 들으니까 그냥 속이 좀 아프네... 아 조금만 이러고 있읍시다."
나를 감싸 안은 그의 태평양 같은 등판과, 나를 가두듯 옭아맨 두꺼운 팔뚝. 숨이 막힐 듯한 이 거대한 짐승의 품속에서, 철옹성 같던 내 이성이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퀴퀴하지만 묘하게 포근한 피죤향 섞인 다정다감한 모순적인 수컷 냄새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숨이 막힐 듯한 이 거대한 짐승의 품속에서, 철옹성 같던 내 이성이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그에게서 나는 특유의 다정한 수컷 냄새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1초, 2초, 3초...
그의 뜨거운 대흉근에 짓눌려 있던 내 뺨 위로, 까만 티셔츠의 거친 촉감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쿵, 쿵. 뱃고동 소리 같던 그의 발걸음 소리가 이번엔 그의 거대한 흉통 안에서 미친 듯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진동이 내 온몸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순간.
파사삭. 잠시 전원을 내렸던 내 알량한 이성의 스위치가 미친 듯이 스파크를 튀기며 돌아갔다.
"미, 미쳤어요 지금?!"
나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양손으로 퍽 밀쳐냈다. 하지만 바위산 같은 그 무식한 피지컬은 내 혼신의 밀치기에도 그저 상체만 살짝 뒤로 흔들렸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동 때문에 내가 뒤로 나자빠질 뻔한 걸, 병운이 반사적으로 내 허리를 낚아채듯 잡아주었다.
"아, 아니... 나는 형님이 좀, 힘들어 하는 것 같길래..."
"누, 누가 울었다고 그럽니까! 덥게 진짜, 씨..."
내 허리를 감싼 그의 솥뚜껑 같은 손을 쳐내듯 뿌리치고, 나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얼굴로 피가 무섭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분명 귀끝까지 터질 듯이 새빨개졌을 것이다. 나는 애써 시선을 바닥에 고정한 채 더듬거리며 변명을 뱉었다.
"화, 화장실... 술을 너무 마셨더니 속이 좀..."
"괜찮수? 등이라도 두드려 줘요?"
"됐으니까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요! 냉장고에 물이나 꺼내 마시든가!"
나는 다가오려는 그 곰탱이를 향해 빽 소리를 지르고는, 도망치듯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잠금장치까지 걸어 잠그고 나서야 나는 세면대 앞으로 무너져 내리듯 고개를 숙였다.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내 꼴은 가관이었다. 눈동자는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볼은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쏴아아- 나는 찬물을 틀어 미친 듯이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을 때렸지만, 병운의 까만 티셔츠에 닿았던 오른쪽 뺨은 여전히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돌았어, 정민후... 진짜 미친놈 아니야? 거길 왜 가만히 안겨 있어!"
나는 양손으로 세면대를 짚은 채 거울 속의 나를 노려보며 이빨을 꽉 깨물었다. 갓 마흔 된 사내새끼가, 그것도 세상 잘난 척은 다 하고 살던 인간이, 월세 30만 원짜리 방에 사는 전직 노가다판 백수한테 안겨서 심장이 터질 뻔했다니.
하지만 알량한 자괴감도 잠시뿐이었다. 내 머릿속은 이미 방금 전 나를 감싸 안았던 그 태평양 같은 등판과, 내 허리를 단숨에 낚아채던 그 억센 전완근의 감촉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유도 선수 출신 특유의 그 묵직하고 폭력적인 힘. 그러면서도 내 상처를 듣고 '속이 아프다'며 눅진하게 내뱉던 그 빌어먹을 다정함.
"하아... 씨발..."
나는 젖은 손으로 얼굴을 마른세수하며, 결국 스스로의 처참한 패배를 인정하듯 실성한 사람처럼 헛웃음을 흘렸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여전히 터질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신 차려, 정민후. 여기서 더 휩쓸렸다간 내 밑바닥까지, 아니 내 진짜 정체성까지 저 인간한테 다 들키고 만다.'
나는 양손으로 세면대를 꽉 쥐고 스스로에게 쐐기를 박았다. 나는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통제된 삶을 살아온 나름 잘 나가는 강사다. 남성 동성애자라는 나의 정체성, 그리고 그중에서도 유독 저런 거대하고 거친 수컷에게 맹목적으로 끌리는 나의 저열한 이상형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었다. 저 인간은 그저 내 일상을 위협하는 층간소음 가해자이자, 빚더미에 앉은 시한폭탄 같은 백수일 뿐이다.
동정심이든, 빌어먹을 발정기든 여기서 끝내야 한다. 단호하게 선을 긋고 당장 내쫓자.
그렇게 무섭게 다짐하며 굳게 잠긴 화장실 문고리를 돌렸다. 철칵, 소리와 함께 거실로 나선 나는 방금 전까지 다잡았던 독기가 무색해지는 광경을 마주해야 했다.
"강병운 씨, 이제 그만 가보...?"

내 차가운 한마디는 허공을 맴돌다 흩어졌다. 소파에 기대앉아 있던 그 거대한 불곰은, 어느새 바닥 위로 완전히 자빠져서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새 남은 소주를 다 들이켰는지 주변엔 빈 초록색 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벌어진 두꺼운 허벅지.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묵직하게 들썩이는 태평양 같은 가슴팍. 살짝 말려 올라간 까만 티셔츠 아래로 힐끗 보이는 탄탄한 복부와 부드러워 보이는 체모들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이 미련한 곰탱이의 자는 모습을 탐욕스럽게 훑어 내렸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이쪽 바닥 생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게이라면 혀를 내두를 완벽한 '베어'의 표본이었다. 저 무식한 떡대, 덥수룩한 수염, 짐승 같은 흉터. 나같이 깐깐하고 방어적인 은둔형 게이조차 이성을 잃고 허덕일 정도니까. 정작 본인은 자기가 얼마나 최상위 포식자인지 쥐뿔도 모르는 채, 징그러운 산적 놈이라고 철저하게 자기혐오에 빠져 있는 그 멍청하고 순진한 무지함이 나를 더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이런 인간이야말로 게이였어야 했는데. 그럼 이 인간의 인생이 좀 사랑받는 인생으로 바뀌었을까?'
그게 나를 더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었다. 내가 그토록 혐오하던 주류 게이 문화와 천박한 욕망의 한가운데에 던져놔도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컷이, 지금 내 거실 바닥에서 뽀얗게 하얀 양말을 신은 채 세상모르고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으음..."
병운이 잠결에 뒤척이며 두꺼운 팔뚝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장 깨워서 밀어내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나왔건만, 저 무방비한 짐승을 발로 차서 쫓아낼 독기는 이미 증발하고 없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결국 녀석의 옆자리에 다시 소리 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까만 티셔츠 위로 일정하게 오르내리는 그의 숨결이, 또다시 묵직한 뱃고동 소리가 되어 내 거실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나는 이 강박적일 정도로 통제된 나만의 성에서 홀로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인에게 선을 긋고 내 진짜 모습을 숨긴 채 살아가는 엘리트 강사의 삶은, 겉보기엔 번듯했지만 속은 지독하게 건조하고 공허했다. 그런데 지금, 내 공간을 침범한 이 천박하고 무식한 곰탱이의 숨소리가... 신기하게도 내 공허한 성에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 리듬감 있고 무거운 소리가, 마치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나를 지켜주는 유일한 심장 박동처럼 묘하게 가슴 깊숙한 곳을 어루만지며 위안을 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 지독하고 끈적한 소음에서 벗어나는 건, 애초에 글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물끄러미 그의 발끝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내 시선을 강탈하던 그 뽀얀 하얀 양말. 저 거칠고 폭력적인 덩치에, 저렇게 얌전하고 하얀 천이라니. 그 묘한 대비가 내 안의 변태적이고 은밀한 사심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덥다고 했으니까... 양말 정도는 벗겨줘도 괜찮겠지.'

그럴싸한 핑계를 속으로 삼키며, 나는 짐짓 동정심 많은 집주인인 척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스르륵.
부드러운 면양말이 그의 육중한 발뒤꿈치를 지나쳐 미끄러지듯 벗겨져 나갔다. 드디어 드러난 야생의 곰 발바닥.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맨발을 아주 세밀하고 탐욕스럽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의 발은 예상대로 컸다. 그리고 아주 무식하게, 옆으로 넙대대했다. 유도 선수 출신답게 매트 바닥을 움켜쥐고 버티느라 넓게 벌어진 듯한 그 발가락마저 굵직굵직한 게, 영락없이 흑곰의 앞발 같았다.
십 년 넘게 험한 공사판과 운동부를 전전하며 살아온 인생을 증명하듯, 뒤꿈치나 옆면에는 포슬포슬한 각질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거칠고 투박한 각질의 질감이, 아까 느꼈던 그의 굳은살 박힌 손바닥을 연상시켜 내 심장을 다시금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저 거친 각질 위로 내 혀끝을 대고 핥아내며, 그 안에 가득 찬 농밀한 수컷의 진액을 죄다 들이켜고 싶다는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발은 의외로 깨끗했다.
비참한 백수 생활을 하면서도 최소한의 청결만큼은 신경 썼는지, 손가락 굵기만 한 두꺼운 발가락 사이사이엔 특별히 더러운 때나 무좀 흔적은커녕 퀴퀴한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그 투박하고 거친 각질 아래로 뽀얗고 탄력 있는 속살이 언뜻언뜻 비치는 그 묘한 대비.
발톱은 거칠게 깎여 있었지만, 하얀 양말에 감싸여 있던 그 뽀얀 발목 위로 굵은 힘줄이 언뜻언뜻 비치는 그 묘한 대비가, 내 안의 변태적이고 은밀한 가학심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당장이라도 저 큰 발을 움켜쥐고, 그 하얀 양말 위로 진득하게 코를 박고 싶을 만큼, 궁상맞은 갈증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유도 선수 출신 특유의 그 묵직하고 폭발적인 힘. 그러면서도 내 상처를 듣고 '속이 아프다'며 눅진하게 내뱉던 그 빌어먹을 다정함.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지독한 아쉬움마저 느꼈다.
나는 홀린 듯, 내 슬며시 떨리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넙대대한 발바닥 중앙의 굵은 가시가 돋친 듯한 각질을 진득하게, 아주 진득하게 쓸어내렸다. 얇은 면양말을 뚫고 그의 탄탄하고 뜨거운 하체 체온이 내 살갗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낯선 온기에 당황했는지, 병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까만 티셔츠 위로 그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으음..."
발끝에 닿은 낯선 촉감이 간지러웠는지, 병운이 잠결에 무식하게 큰 발가락을 움찔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거실엔 다시 그의 묵직하고 규칙적인 숨소리, 그 뱃고동 소리만이 평화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내 집에 굴러들어 온 이 어리숙하고 거대한 짐승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 밤, 이 무방비한 곰탱이를 거실 바닥에 눕혀두고 내가 과연 1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을까. 머릿속이 온통 끈적한 상상으로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으음... 끄응."

발끝에 닿은 낯선 촉감에 몸서리치듯 낮은 신음이 터져 나오더니, 통나무 같은 오른쪽 팔뚝이 육중하게 가슴팍 위로 올라왔다. 솥뚜껑만 한 손가락이 거칠게 배와 옆구리를 긁기 시작하자, 가뜩이나 터질 듯 팽팽하던 까만 티셔츠 자락이 스르륵, 아주 스르륵 위로 들춰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뻗었던 손을 거뒀지만, 거실의 미등 아래로 드러난 광경에 시선이 못박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조각처럼 갈라진 식스팩이 아니었다. 유도 선수 특유의 그 묵직하고 단단한 코어 근육 위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하얀 지방층이 제법 두툼히 덮여 있는... 무식하게 넙대대하고 통통해 보이는 뱃살이었다. 은은히 구불대는 짧은 털이 촘촘하지 못하게 나 있는 그런 형상. 그건 미치도록 탐스러운 야생의 질감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거칠게 긁적이는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까만 면 소재 너머로 젖꼭지의 짙은 실루엣이 살짝 보일락 말락 하게 아슬아슬한 유혹을 토해내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거실 미등 아래로, 까슬하게 긁힌 자국이 선명한 그의 단단하지만 통통해 보이는 뱃살과, 그 위로 가장자리에 다듬어지지 않은 털이 나풀대는 젖꼭지가 살짝 보일락 말락 하게 비치는 그 노골적이고도 아찔한 경계.
거실엔 다시 그의 묵직하고 규칙적인 숨소리, 그 뱃고동 소리만이 평화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지독한 아쉬움마저 느꼈다.
나는 내 집에 굴러들어 온 이 어리숙하고 거대한 짐승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늘 밤, 이 무방비한 곰탱이를 거실 바닥에 눕혀두고 내가 과연 1분이라도 눈을 붙일 수 있을까. 머릿속이 온통 끈적한 상상으로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마흔이 되도록 악착같이 붙잡고 살아온 나의 얄팍한 이성이, 저깟 백수 곰탱이 하나 때문에 이렇게 허무하게 흐트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빌어먹을 층간소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나의 지극히 단순하고 합리적인 욕구가, 종국에는 이성의 끈을 붙잡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야 하는 생존을 건 대난전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애써 시선을 허공으로 돌리며, 안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얇은 여름용 담요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숨을 꾹 참은 채, 그 미치도록 탐스러운 상체 위로 담요를 덮어버렸다. 눈치 없이 싹도는 군침과, 금방이라도 뻗어 나갈 것 같은 내 변태적인 손모가지를 어떻게든 잠재우기 위한 최후의 발악이었다.
다시 안방으로 돌아온 나는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눈을 꽉 감았다. 그저 이 끈적하고 위험한 밤이, 미칠 듯이 길었던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 주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거실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육중한 뱃고동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내가 대체 그 밤 어떻게 잠들었는지조차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뻑뻑한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거실로 나섰을 때 그 거대한 짐승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젯밤 볼썽사납게 널브러져 있던 초록색 소주병들은 베란다 분리수거함 옆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고, 내가 그 탐스러운 상체 위로 던지듯 덮어주었던 얇은 여름용 담요는 소파 한구석에 각이 잡힌 채 반듯하게 개켜져 있었다.
나는 홀린 듯 소파로 다가가 그 얇은 천 조각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손끝에 닿는 서늘한 섬유의 감촉 너머로, 어젯밤 내 코끝을 어지럽히던 짙은 수컷의 땀 냄새와 묘하게 풋풋했던 비누향이 아직 미세하게 들러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무식하게 큰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남의 집 얇은 담요가 구겨질까 봐 꼼지락거리며 각을 맞춰 갰을 곰탱이의 모습을 상상하니 속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학원으로 출근해 학생들의 문제지를 빨간 펜으로 밑줄을 긋는 내내, 내 머릿속은 온통 어젯밤의 파편들로 진득하게 엉켜 들었다.
나를 옭아매던 그 단단한 팔뚝과, 상처받은 짐승처럼 눅진하게 울리던 그 빌어먹을 다정함. 백수건달에 빚쟁이 주제에 사람 속을 무장해제 시키는 순박함과 순진함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펜을 강하게 쥐며 억지로 현실 감각을 끄집어냈다. 그 둔해 빠진 인간이 이쪽 세계의 사람일 리는 만무했다. 그저 자기 친구를 구하겠다고 앞뒤 안 재고 인생을 던졌던 것처럼, 남의 상처를 보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미련한 오지랖일 뿐이겠지.
이 바닥에서 세상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비극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 남자가 무심코 베푸는 맹목적인 다정함에 착각하고, 혼자 진흙탕을 뒹굴며 마음을 뺏겨 괴로워하는 것. 그건 이제 막 정체성을 깨닫고 허우적대는 스무 살 언저리의 어린 게이들이나 하는 가장 뻔하고 쪽팔린 실수였다. 남들보다 배는 깐깐하게 이성 하나로 이 자리까지 버텨온 내가, 그런 유치하고 소모적인 감정 놀음에 빠져 허덕일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라, 정민후. 여기서 선을 넘으면 남는 건 비참함뿐이다.'
나는 턱끝까지 차오르는 그 끈적한 미련을 애써 삼켜내며, 스스로에게 수십 번 방어벽을 쳤다.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란, 아니 나의 이 알량한 이성이란 참으로 모순적이고 얄팍했다.
그렇게 온종일 스스로를 다그치고 채찍질했건만,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리는 내 발걸음은 묘한 기대감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동네 어귀의 편의점을 지날 때는 나도 모르게 '어제는 맥주가 모자랐으니 오늘은 넉넉하게 사다 놓을까' 하는 실성한 생각마저 들었다. 어젯밤처럼 그 육중한 뱃고동 소리가 내 거실 바닥에서 울려 퍼지기를, 그 미치도록 탐스러운 육체가 다시 내 공간에 머물러 주기를 미친 듯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내 머리 위 3층은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밤 10시가 넘고 12시가 다 되어가도록, 친구들과 떠드는 시끄러운 소음은커녕 평소 그가 화장실을 들락거릴 때마다 낡은 배관을 타고 내려오던 미세한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그 끔찍한 층간소음이 사라졌는데, 완벽하게 평화로워진 나의 성 안에서 나는 도무지 안도의 한숨을 쉴 수가 없었다.
새벽 2시. 나는 캄캄한 거실 소파에 홀로 앉아, 아무런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 천장만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가슴 한구석에 지독한 서운함과,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공허함이 시커멓게 번져가고 있었다. 이대로 그 곰탱이가 영영 자취를 감춰버린 건 아닐까 하는, 찌질하고 궁상맞은 초조함에 입술만 피가 나도록 짓이기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 무거운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안방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하지만 억지로 눈을 감아도, 어젯밤 내 허리를 감싸 안던 그 투박한 손길과 눅진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아 도무지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자는 둥 마는 둥, 무거운 선잠 속을 헤매다 겨우 의식을 놓은 것은 아마 새벽 3시는 훌쩍 넘어서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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