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13편)
13편. 완벽한 여름
"흑..."
마지막 딸꾹질을 끝으로, 거실을 울리던 내 요란한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정적이 찾아오자, 눈물과 함께 가출했던 이성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알량한 이성이 가장 먼저 던진 싸늘한 질문은 이러했다.
'아니... 미쳤냐, 정민후? 그 나이에 지금 다 큰 사내놈 품에 매달려서 엉엉 운 거냐? 아 부끄러워.'
순식간에 귓바퀴부터 목덜미까지 뜨거운 피가 쏠렸다. 쪽팔림이라는 거대한 해일이 방금 전까지의 애틋함과 감동을 처참하게 집어삼켰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녀석의 가슴팍에 파묻고 주먹으로 콩콩 치기까지 했다고? 미쳤다. 진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혀, 형님... 이제 진정이 좀 됩니까?"
품 안에서 뻣뻣하게 굳어버린 나를 느낀 병운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녀석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스르륵 풀고,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크흠..."
나는 시선을 바닥에 처박은 채 애써 작게 헛기침을 했다. 도저히 녀석과 눈을 맞출 자신이 없었다. 슬쩍 내려다본 녀석의 회색 면 티셔츠 가슴팍은 내 눈물과 콧물로 아주 축축하고 둥글게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꼭 제주도 같네.
"저기, 그... 휴, 휴지. 휴지 좀..."
코맹맹이 소리가 적나라하게 섞여 나온 내 꼴사나운 목소리에, 병운이 그제야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예! 잠시만 기다리십서!"
우람한 몸뚱이의 거대한 곰탱이가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화장실 쪽으로 달려가더니,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들고 부리나케 내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투박한 손으로 휴지를 둘둘 말아 뜯더니, 내 얼굴을 직접 닦아주려다 멈칫하고는 조심스레 내밀었다.
"여기 있수다..."
"어... 고마워. 내가 닦을게."
나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휴지를 받아 들고 훌쩍이며 코를 닦아냈다. 쪽팔려서 콱 혀라도 깨물고 싶은 내 심정도 모르고, 녀석은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님... 눈이 완전 산토끼처럼 새빨갛수다. 코끝도 다 헐어버렸고."
"아, 진짜... 나이 먹고 동생 앞에서 주책맞게 이게 무슨 꼴이냐. 쪽팔리니까 그만 봐..."
내가 웅얼거리며 한 손으로 붉어진 눈가를 가리자, 병운의 입술 사이로 아주 작고 다정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슨 주책입니까. 형님도 사람인데, 다 털어내고 속만 시원해졌으면 됐지."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내 정수리에 조심스레 닿더니,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를 안쓰러워 죽겠다는 듯 쳐다보는 저 맹목적이고 투명한 눈빛. 그 따뜻한 손길에 부끄러움으로 화끈거리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보다 뭐야 이 어린 아이 달래는 듯한 스윗한 손동작은?
"옷 다 젖었네... 미안하다. 얼른 벗어, 내가 빨아줄게."
"아이 됐수다. 갈아 입으면 되죠. 형님 눈물인데 백 장도 더 적실 수 있수다. 다 울었으면 얼른 씻고 오십서. 눈물 쏟느라 진 다 빠졌을 텐데, 고기 팍팍 넣고 된장찌개 끓여드릴 테니까."
병운은 젖은 티셔츠 자락을 훌렁 벗어 바닥에 던지며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거실을 가득 채우는 녀석의 든든하고 낮은 목소리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코끝이 찡하게 시려왔지만, 녀석이 끓여줄 된장찌개 냄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내 세상은 이미 완벽하게 따뜻해져 있었다.
화장실에서 퉁퉁 부은 눈가를 찬물로 식히고 거실로 나오자, 좁은 집안 가득 구수하고 짭조름한 찌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다 씻었수까? 얼른 이리 와서 앉으십서."
거실 한가운데에는 식탁 대신 다리가 짧은 접이식 밥상이 덩그러니 펼쳐져 있었다. 상 위에는 뚝배기 안에서 아직도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를 중심으로, 먹음직스런 반찬들이 오밀조밀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배달 음식이나 대충 시켜 먹고, 그마저도 귀찮으면 냄비째 끓인 라면에 찬밥이나 훌훌 말아 먹던 녀석의 식습관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놓인 밥상은 녀석의 평소 일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지극히 정성스럽고 과분한 만찬이었다.
투박하게 숭덩숭덩 썰어 넣은 소고기가 아낌없이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는 의외로 애호박과 양파, 두부까지 알차게 구색을 갖추고 있어 깊고 진한 국물 맛을 내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노른자가 탱글하게 살아있는 완벽한 반숙 계란프라이 두 알과, 칼집을 내어 노릇하게 구워낸 저렴한 분홍빛 소시지 부침. 그리고 퇴근길 마트에서 급하게 사 온 것이 분명한 플라스틱 대기업표 파김치까지.
갓 지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하얀 쌀밥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을 바라보며, 나는 왈칵 차오르는 벅찬 감정을 삼키기 위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거대한 사내가 좁은 주방에 서서, 오직 나 하나를 먹이겠다고 도마질을 하고 불 앞을 서성였을 그 분주했던 뒷모습이 눈앞에 선연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아이 뭘 그렇게 빤히 봅니까. 입맛에 안 맞을까 봐 무섭수다. 일단 한술 떠 보십서."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마주 앉은 병운이, 커다란 손으로 숟가락을 쥐여주며 멋쩍은 듯 뒷목을 긁적였다. 나는 말없이 찌개 국물을 떠서 입에 넣었다. 소고기의 기름진 감칠맛과 채소의 단맛이 어우러진, 믿을 수 없을 만큼 깊고 따뜻한 맛이 텅 빈 위장을 타고 찌릿하게 흘러내렸다.
"와! 진짜 맛있다. 너 언제 이런 걸 다 끓였어?"
"맛있으면 많이 드십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드셨을 거 아닙니까."
녀석은 자기 밥그릇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내 밥그릇 위로 소시지 부침과 파김치를 연신 올려주기 바빴다. 마치 오랜만에 시골집에 놀러 온 손주에게 이것도 저것도 먹어보라 반찬을 올려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잠깐 날 정도였다.

"아휴 됐어. 너도 밥 먹어. 알아서 먹을게."
그 투박하고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밥을 절반쯤 비워냈을 때쯤, 녀석이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님... 화는 이제 다 풀렸슴까?"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안의 밥을 천천히 씹어 삼켰다. 녀석의 불안한 동공이 내 입술 끝에 매달려 있었다.
"나? 화 안 났어. 실은 화 났던 적 없어."
"예?"
"화가 난 게 아니라... 그냥 서운했을 뿐이야."
내 솔직한 대답에 병운의 커다란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녀석은 죄인처럼 시선을 내리깔며 젓가락 끝으로 빈 밥알만 끄적였다.
"그래도... 공항에서 형님이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휑하니 가버릴 줄은 몰랐수다. 나 진짜, 그때 눈앞이 다 캄캄해져서..."
"콜록! 컥!"
순간, 밥이 기도에 턱 걸리며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깟 얄팍한 자존심 좀 세워보겠다고, 상처받은 녀석을 공항 한복판에 짐짝처럼 버려두고 택시를 타버렸던 나의 치졸하고 잔인했던 행동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콜록, 아... 미안."
"아이고, 천천히 드십서! 물, 물 여깄수다."
놀란 병운이 황급히 물컵을 건네주며 내 등을 커다란 손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간신히 숨을 고르자, 녀석이 못내 씁쓸한 표정으로 무거운 진심을 툭 털어놓았다.
"형님이 저를 얼마나 믿고 의지해 주시는지 아는데... 제가 갑자기 호텔에서 그렇게 정신을 놓고 버릇없이 언성을 먼저 높여버렸으니 당연히 놀라고 서운하셨을 겁니다. 제가 잘못했수다."
"병운아, 그건 네 잘못이..."
"그게 치형이는..."
불쑥 튀어나온 그 이름에, 거실의 공기가 일순간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병운의 시선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제 입술을 짓이기듯 깨무는 녀석의 얼굴에는,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아물지 못한 서늘하고 끔찍한 바다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내게 오해를 풀기 위해, 가장 마주하기 싫은 과거의 심연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려는 녀석의 처절한 노력. 나는 서둘러 상 위로 손을 뻗어, 녀석의 커다란 두 손을 포개어 꽉 쥐었다.
"병운아."
내 단호하고 부드러운 부름에 녀석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애써 이야기 안 해도 괜찮아. 무리해서 말할 필요 없어."
"하지만 형님..."
"억지로 옛날이야기 꺼내면서, 네가 또 그 아픈 기억들 떠올리고 상처받는 거... 싫어. 안 듣고 싶어."
녀석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잘게 흔들렸다. 내 눈빛에 담긴 깊은 이해와 연민을 마주한 병운은 잠시 숨을 멈춘 채 굳어 있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민철이... 그 자식이, 다 이야기했수까."
원망보다는 허탈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부정하지 않고 녀석의 손을 쥔 손가락에 조금 더 다정하게 힘을 주었다.
"그래. 내가 민철이 한테 물어 본거야. 네가 그 아이를 잃고 얼마나 지옥 같은 시간을 버텨왔는지. 그리고... 그 아이가 널 어떤 마음으로 바라봤었는지도."
내 마지막 말에 병운의 커다란 몸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흠칫 굳어졌다. 녀석은 황급히 내 손을 뿌리치듯 빼내려 했지만, 나는 보란 듯이 두 손으로 녀석의 투박한 손을 더 꽉 틀어쥐며 놔주지 않았다.
"형, 형님..."
녀석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가는 눈동자에는 지독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가?"
짐승의 신음 같은, 물기 어린 목소리였다. 녀석은 차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덜덜 떨리는 숨을 토해냈다.
"징그럽지 않수까. 사내놈 둘이서... 치형이 그 녀석이 나한테 품었던 마음도, 그걸 징그럽다 밀어내놓고 정작 녀석이 죽고 나니 평생 잊지도 못하는 이 등신 같은 내 과거도... 다, 형님 눈엔 비정상적이고 끔찍해 보일 텐데..."
나에게 미움받을까 봐, 내가 자신을 혐오스럽게 쳐다보고 도망칠까 봐 두려워 온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떠는 가련한 한 마리의 곰. 이미 거칠게 야생을 살아가는 맹수의 모습은 없는 듯 했다.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길들여진, 우리를 벗어나면 살아가기 어려운 사육장의 곰을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바짝 얼어붙어 있는 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내 픽 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잔뜩 찌푸려진 녀석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환기하듯 가벼운 말투로 툭 내뱉었다.
"징그럽긴. 우리도 이미 충분히 징그럽지 않니?"
예상치 못한 내 엉뚱한 대답에 녀석이 동공을 크게 키우며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맞잡은 녀석의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다 엄지로 녀석의 두툼한 손바닥을 살살 긁으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봐. 잘 때 울면서 친한 형을 뒤에서 백허그하는 몸무게가 100이 넘는 거산 같은 곰탱이랑, 지 서운하게 만든 동생 며칠 못 보니까 보고 싶어 올라와선 껴안고 자는 형이나. 남들이 보면 우리가 더 징그럽고 유난일걸."
내 능청스러운 팩트 폭력에, 병운의 입술이 바보처럼 반쯤 벌어졌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뇌 회전이 멈춘 듯 깜빡이는 투명한 눈동자를 보며 나는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아니 그... 그건..."
"그러니까 그런 쓸데없는 자격지심 갖지 마. 난 네 과거 하나도 안 이상하고, 안 징그러워."
나는 웃음기를 거두고, 조금 전보다 훨씬 다정하고 진중한 눈빛으로 녀석과 시선을 맞췄다. 치형이라는 이름 뒤에 남겨진 상처는 참혹하고 아팠지만, 그 이면에 존재했을 두 사람의 아름답고 눈부셨던 시절이 그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비록 끝은 참담했을지라도, 그 길고 푸르렀을 20대의 시간 동안 이 다정한 사내의 곁에 내가 없었다는 사실이 불쑥 아쉬워졌다.
"병운아. 만약에 말야."
내 부름에 병운은 쥐고 있던 숟가락을 상 위에 내려놓고 침을 꼴깍 삼켰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면... 그래서 학창시절 때부터 서로 알고 지냈으면 어땠을까?"
"...예? 무슨 말씀을..."
"우리가 한 고등학생 때 쯤 만나 10대를 함께 보내고 이십 대 때도 함께 지냈으면 어땠을까? 그래서 우리가 10년이고 20년이고, 쭉 서로 알고 살았으면 어땠을까."
녀석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내 입술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터덜터덜 돌아가던 선풍기 소리마저 아득하게 멀어지고, 좁은 거실에는 오직 녀석의 거친 숨소리와 내 나지막한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나는 너라는 정말 착하고 멋진 동생을, 마흔이 다 되어버린 지금에서야 만났잖아."
나는 녀석의 손등을 뒤집어 투박하고 상처투성이인 그 손등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뭐 백세시대라니까 나에게 남은 시간이 50년일지 60년일지 모르겠는데... 너랑 그 지나간 10년, 20년을 함께 보내지 못한 게, 난 그게 너무 질투가 날 것 같다. 누군가는 너의 10대 때 천진난만한 모습, 20대 때의 조금 힘이 넘치던 모습도 알고 있을 거 아냐."
쿵.
녀석의 커다란 어깨가 무언가에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흠칫 떨렸다. 내 고백에 담긴 무게를 뒤늦게 알아차린 듯, 녀석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50년, 60년을 너와 함께하겠다'는 이 우회적이고도 노골적인 약속. 내가 제 과거의 상처를 징그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해 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에, 병운은 완전히 무너져 내린 얼굴을 했다.
"혀, 형님... 지금 그 말은..."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늘 듬직하고 태산 같던 사내의 붉어진 눈시울에 기어이 투명한 물이 차올랐다.
병운은 내게 붙잡혀 있던 자신의 커다란 두 손을 빼내더니, 이번에는 반대로 내 두 손을 아주 조심스럽고 간절하게 감싸 쥐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을 쥐는 듯한 손길이었다. 녀석의 커다란 손바닥이 얼마나 뜨거운지, 내 손끝까지 그 열기가 훅 끼쳐 올라왔다.
"형님... 형님은 저같은 사람이 아니라 잘 챙겨줄 좋은 형수님을 만나야죠."
순간 녀석이 날 거절하는 건가 싶어서 아쉬움이 들려는 찰라, 그 말을 하는 병운의 눈에 강한 미련이 줄기차게 흐르는 걸 봐서 한번 더 용기를 냈다.
"네가 있는데 마음에도 없는 형수를 왜 찾아? 어차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텐데."
"진짜, 진짜 나 안 징그럽수까? 내가... 내가 형님 곁에서, 평생 형님 챙기고 밥 해 먹이면서 그렇게 살아도... 진짜 괜찮은 겁니까?"
결국 녀석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져 내 손등 위로 번졌다. 두려움에 떨던 가련한 맹수가, 비로소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는 단 하나의 안식처를 찾고 쏟아내는 구원의 눈물이었다.
나는 녀석의 젖은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쳐주며, 일부러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툭 농담을 던졌다.
"뭐래, 밥은 내가 해 먹여 주고 싶은데?"
내 말에 병운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나는 상 위에 놓인 녀석의 손을 잡은 채로 부드럽게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근데 네가 해준 밥이 내가 차린 밥상보다 더 맛있는 것 같긴 해."
그제야 내 농담의 의미를 알아차린 병운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안도감과 벅차오름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한 녀석은 결국 끅, 하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와 함께 푹 고개를 떨구었다. 커다란 어깨가 형편없이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을 조심스레 놓고 자리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좁은 밥상 너머로 두 팔을 뻗어, 고개를 푹 숙인 채 흐느끼는 이 거대하고 가여운 사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녀석의 뜨거운 이마가 내 어깨 언저리에 닿았다. 나는 녀석의 넓은 등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단단하게 쓸어내리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우리는 서로 밀어내지 말자. 겁내지도 말고, 눈치보지도 말자."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병운의 숨결이 거칠게 요동쳤다. 이내 녀석의 커다란 두 팔이 등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저 말없이 내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병운아 형도 이제는 더 이상 눈치 안 보고 살고 싶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생각이야. 그냥 너라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품안에 담고 싶은데, 이걸 왜 눈치봐야 하는 지 모르겠어. 안 그러니?"
내 진심 어린 고백에 병운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내 허리를 껴안은 팔에 부서질 듯 힘을 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허락된 이 작은 온기를 영원히 잃고 싶지 않은, 한 남자의 가장 순수하고 처절한 항복이었다. 좁은 거실 한가운데, 구수한 찌개 냄새와 창밖으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우리의 체온 위로 고요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울음이 멎을 때까지, 식어가는 밥상 너머로 오래도록 그 넓고 단단한 등을 쓰다듬었다.
드디어 이 넓은 품을 안고 쓸어내려도 마음에 무거운 죄책감이 들지 않게 되었다.
눈물 젖은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말없이 상을 치우고 나란히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했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와 따뜻한 물소리 사이로 가끔씩 서로의 어깨가 부딪힐 때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간질간질한 공기가 좁은 주방을 채웠다.

모든 뒷정리가 끝나고, 우리는 거실 한편에 놓인 좁아터진 싱글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거대한 곰탱이 하나와 만만찮게 덩치가 있는 성인 남자 둘이 눕기에 싱글 침대는 터무니없이 좁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어깨와 골반이 빈틈없이 맞닿은 채, 천장을 보고 나란히 누운 우스꽝스럽고도 애틋한 자세가 되었다.
"형님. 좁지 않수까. 차라리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가만있어봐. 안 좁아. 따뜻하고 좋기만 한데."
"이 한 여름에요?"
"어, 난 늙어서 여름에도 추위 타."
내가 뒤척이려는 녀석의 커다란 손을 꽉 깍지 껴 잡으며 못 박듯 말하자, 녀석은 더 이상 몸을 빼지 않고 얌전히 내 손을 마주 쥐어왔다.
방 안의 형광등을 끄고,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천장을 응시하던 중이었다. 내 손을 쥔 녀석의 커다란 엄지손가락이 내 손등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더니,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형님, 그... 치형이가... 제게 처음 마음을 고백했던 날 말입니다."
과거의 죄책감에 짓눌려 숨조차 쉬지 못하던 어젯밤과는 달랐다. 녀석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있었지만, 어딘가 한결 편안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묵묵히 녀석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때 전 너무 무식하고 어렸수다.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고, 거친 현장 아재들 틈에서 노가다만 뛰다 보니... 사내놈이 사내놈을 좋아한다는 게 무슨 큰 몹쓸 병이거나, 세상 무너지는 큰 죄인 줄로만 알았거든요."
녀석이 아주 작게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뽀얗고 앞날 창창한 어린 놈이, 나 같은 미련한 놈 옆에 붙어있다가 남들한테 손가락질받고 평범한 인생마저 망칠까 봐 겁이 났수다. 그래서 모질게 뺨까지 올려붙이면서 호통을 쳤죠. 정신 차리라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여자 만나서 장가도 가고 사람답게 살라고. ...그게 형으로서 그 녀석을 세상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진짜 멍청하게 착각했던 겁니다."
잡고 있는 녀석의 손에 꾹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의 단단한 어깨에 내 어깨를 조금 더 바짝 기대어 주었다.
"근데... 그 녀석을 그 차가운 바다에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어둠 속에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병운의 두 눈동자가 가로등 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세상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정상'이나 '평범' 같은 건,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껍데기라는 걸요. 내 전부였던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는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세상이 우릴 뭐라고 부를지... 그깟 게 대체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녀석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지만, 거기에는 더 이상 무너져 내리는 절망 대신 단단한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병운은 맞잡은 내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뜨거운 입술에 가만히 맞췄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형님한테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여서 미칠 것 같았을 때. 예전처럼 '나는 남자고 형님도 남자니까 이러면 안 돼'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 해봤수다."
"병운아..."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인 건지, 아니면 정민후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된 건지, 그런 거창한 정의나 이름표 같은 건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수다. 내가 아는 건 딱 하나뿐입니다."
녀석이 몸을 모로 돌려 나를 온전히 마주 보았다. 좁은 침대 위, 코끝이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녀석의 뜨겁고 일정한 숨결이 내 뺨을 간질였다.
"형님이 웃으면 내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고, 형님이 날 투명 인간 취급할 때면 당장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것 같았다는 거.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 징그럽다고 손가락질을 받든... 내 평생에 다시는 이 온기를, 정민후라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는 거. 그거 하나만 뼈저리게 깨달았수다."
나를 오롯이 담아내는 녀석의 곧고 맑은 시선 속에서, 나는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하고 맹목적인 사랑의 실체를 보았다.
"그러니까 형님. 내가 평생 눈치 안 보고, 뻔뻔하게 형님 옆에서 밥 해 먹이면서 살게 해주십서. 형님이 밀어내도, 이제 두 번 다시는 안 도망갈 거니까."
투박하지만 세상 그 어떤 고백보다 지독하게 로맨틱한 선전포고였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픽 웃음을 터뜨리며, 비좁은 틈새로 팔을 뻗어 녀석의 굵은 목을 끌어안았다.
"누가 도망가게 둔대? 각오해라. 난 남자지만 늙은 여우야 한 번 꽉 물면 절대 안 놔줄 거니까."
내 장난스러운 대답에 병운이 그제야 안도한 듯 소리 내어 웃으며, 커다란 팔로 내 허리를 빈틈없이 끌어당겼다.
좁아터진 싱글 침대 위, 우리는 한 몸처럼 뒤엉킨 채 오래도록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녀석의 심장 소리와 내 심장 소리가 마침내 하나의 박자로 완벽하게 겹쳐 뛰고 있는, 참으로 완벽한 여름밤이었다.

다음 화 집필 중인데
아마 15화가 마지막 화가 될 것 같아.
시즌2도 열심히 준비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