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3편)
3편. 저당잡힌 그 목숨
그게 시작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파르르 떨리는 편의점 앞 플라스틱 테이블. 병운은 이미 서너 병은 비운 듯한 소주병을 툭 치며 낄낄거렸다. 그의 짧게 깎은 머리카락 아래로, 햇볕에 거칠게 그을린 목덜미가 보였다. 그리고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아침에 본 파란 트레이닝복 상의는, 그의 근육질 체격을 감당하기 버거운 듯 터질 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쪽은 내가 그냥 태생이 게을러터진 한량이라 노는 줄 알죠?"
병운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물었다. 나는 순간 의표가 제대로 찔려 뜨끔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가, 대답 대신 내 몫으로 산 맥주 캔을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병운은 내 침묵을 긍정으로 읽었는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한때는 노가다판에서 알아주는 에이스였어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성질머리는 좀 더러워도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거든. 근데 씨... 그 마지막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소장 새끼가 문제였지. 지 자식 같은 알바생 임금을 떼먹고는 '너 같은 놈은 배운 게 없어서 이래도 된다' 이 지랄을 하잖아. 그거 보고 참을 놈이 어딨어요? 내가 그 새끼 멱살 잡고 현장 한판 뒤엎었죠. 뭐, 덕분에 블랙리스트 올라서 이 바닥 발도 못 붙이게 됐지만..."
병운이 거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마디에는 아직도 그때의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여 있었다.
"그래도 한 번은 제대로 살아보려고 그랬어요. 셔츠도 사고, 넥타이 매는 법도 유튜브 보고 배워서 통신사 대리점에 들어갔죠. 나 같은 놈이 '폰팔이' 소리 듣는 게 뭐 대수라고. 번듯하게 일해서 사람 대접 좀 받아보려던 건데."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빈 잔을 채웠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쓴 표정이었다.
"어느 날은 귀도 잘 안 들리는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군대 간 손주랑 영상통화 하고 싶다고 요금 좀 깎아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 할매 생각나서 내가 진짜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결합 상품이고 뭐고 다 묶어드렸죠. 근데 그 복잡한 약관을 내가 뭘 알겠어요?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했는데, 본사 놈들이 숨겨놓은 독소 조항까진 몰랐던 거지."
병운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 달에 그 할머니한테 요금 폭탄이 터졌어요. 그 집 아들이 쫓아와서 사기꾼이라며 내 뺨을 후려치는데... 그 할머니 눈빛을 잊질 못하겠더라고. 점장 새끼는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고 바로 짐 싸라고 하고. 나 그날 이후로 셔츠 다 찢어버렸어요. 나 같은 놈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한테는 그냥 양아치 새끼일 뿐이더라고."
병운은 남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허공을 향한 그의 혼잣말이 밤공기에 흩어졌다.
"근데 웃기지 않아요? 나 지금도 그 할머니 요금 메꿔주려고 밤마다 대리운전 뛰고 싶어도 다리가 병신이라 못 해. 세상이 참..., 나한테만 너무 박하네요."
그의 뒷모습이 가로등 그림자에 길게 늘어졌다. 그건 게으른 백수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너무 일찍 꺾여버린 누군가의 비명 같았다.

"술 들어가니까 좀 덥네요."
그는 입고 있던 저지 상의를 벗어 바로 옆 의자에 얹어 놓았다. 그랬더니 좀 더 그의 탄탄하고 다부진 상체 윤곽이 하얀 셔츠아래로 드러났다.
나는 묵묵히 남은 맥주 캔을 비웠다. 3층 한량의 삶이 이토록 처절하게 박살 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아픈 사연과는 별개로 내 불면의 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사정 딱한 건 알겠네요. 그런데 앞뒤가 안 맞잖아요?"
나는 빈 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서늘한 목소리로 그를 쏘아붙였다.
"그렇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우면서, 왜 매일 밤 친구들을 불러다 그 난리 부르스를 쳐댄 겁니까? 당신 집 천장이 휘모리인지 자진모리인지 암튼 정신나간 장단으로 울릴 때마다, 저도 몇 번이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었거든요."
내 날 선 비난에 병운의 거대한 몸집이 움찔했다. 그는 굵은 손가락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푹 숙인 고개 너머로 자조적인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진짜 미안하게 됐수다. 사실은, 그 미친놈들이 날 살려보겠다고 부린 발악이었거든."
"살려요?"
"통신사 그 일 터지고 빚더미에 앉았을 때, 진짜 세상이 끝난 줄 알았어요. 매일 밤 방구석에 앉아서 연탄을 피울까, 약을 털어 넣을까 수만 가지 고민을 했죠. 그러다 결국 그날, 목을 맸어요. 평소에도 입버릇처럼 죽겠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그날따라 그냥... 다 끝나면 이 좆같은 고통도 끝이겠지 싶더라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빈 종이컵에 남은 소주를 남김없이 털어 넣었다.
"근데 내가 평소랑 다르다는 걸 눈치챈 절친 두 놈이, 밤늦게 연락이 안 되니까 비밀번호를 치고 쳐들어온 거예요. 내가 목을 매달고 허공에서 허둥대면서 숨넘어가기 직전인 딱 그 타이밍에."
"..."

"다들 나만큼 한 덩치 하는 놈들이에요. 그 큰 놈들이 거품 무는 나를 짐짝처럼 끌어내리면서 엉엉 울고불고... 아주 생지옥이었지. 그날 이후로 이 새끼들이 내가 또 딴 맘 먹을까 봐, 매일 밤 퇴근하자마자 술을 사 들고 와서 나를 감시하기 시작한 거예요."
병운이 다 탄 담배꽁초를 비벼 끄며 말했다.
"내가 우울한 티라도 낼라치면, 이 무식한 새끼들이 억지로 텐션 올린답시고 나를 들쳐 업고 방방 뛰고 난리를 쳐요. 내가 술기운에 옛날 생각나서 또 죽네 마네 발작하면, 그 거구 세 명이 바닥을 뒹굴면서 나를 깔아뭉개고 말리느라... 하아. 그게 다 밑으로 울렸을 겁니다. 나도 말리고 싶은데, 친구라는 놈들이 나 살리겠다고 매일 같이 와서 저 지랄을 떠니... 밑에 집엔 진짜 할 말이 없네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위층의 그 끔찍했던 소음이, 백수 한량들의 깽판이 아니라 한 인간을 지옥에서 건져 올리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니. 그 산만한 덩치들이 목을 맨 친구를 끌어내리고 바닥을 뒹굴며 오열했을 장면을 상상하자, 목구멍에 미지근한 맥주가 탁 걸리는 기분이었다.
씨발, 이러면 내가 화를 낼 수가 없잖아.
생사람이 죽는 걸 막겠다는데 거기다 대고 '조용히 좀 뒤지시든가, 아니면 조용히 좀 살리세요!' 라고 소리칠 만큼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일 당장 학원 애들 모의고사 풀이를 해줘야 하는 내 불면의 밤을 묵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남은 맥주 캔을 한 번에 비워내고는, 테이블에 탁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결론은, 당신 그 무식한 친구분들은 당신이 혼자 있다가 또 목에 밧줄이라도 걸까 봐 불안해서 매일 밤 출근 도장을 찍는다, 이거네요?"
"...부끄럽지만, 그렇수다."
"당신도 그 덩치들이 억지로 텐션 올려가며 놀아주는 거, 이제 슬슬 버겁고 피곤하죠?"
병운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넓은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무겁게 처져 보였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완벽한 타협안을 던졌다.
"그럼 앞으로 그 친구들 오지 말라고 하세요."
"…...예?"
병운이 탁 풀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빈 캔을 찌그러뜨렸다.
"혼자 있다가 또 딴 생각할까 봐 무서우면, 2층으로 내려와요. 술을 마시든 청승을 떨든 우리 집 거실에서 합시다. 적어도 당신 그 퉁퉁 울려대는 방 보다는, 미친듯이 뛰어도 올라올 사람 없는 우리집이 훨 낫지."
"아니, 그쪽이 왜……."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 불쌍해서 구제해 주려는 거 아닙니다. 100kg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아저씨가 위에서 또 발작하다가 바닥 구르는 소리 들으면, 이번엔 내가 신경쇠약으로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내 수면권은 내가 지켜야겠으니까, 감시가 필요하면 튼튼한 우리 집에서 내가 감시해 주겠다고요."
병운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 거대한 사내가, 내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져 입만 뻐끔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내일부터 당장 친구들 출입 금지시키세요. 어기면 진짜 경찰 부를 겁니다. 내려올 때 소주랑 안주 사 오는 거 잊지 말고요."
나는 뒤통수에 꽂히는 병운의 멍한 시선을 뒤로한 채, 빌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진 몰랐다. 내 수면을 지키기 위한 이 얄팍한 타협안이, 저 거대하고 상처 입은 곰탱이와 나를 어떤 기막힌 동거로 몰아넣게 될지.
과연 저 곰탱이는 내일부터 우리집에 올까?
계속
미리 써 둔 건 여기까지, 지금부턴 템포가 좀 늦어질거야.
그리고 서비스샷
우리 병운이 사랑해 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