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7편)
7편. 목줄
"더워... 바지도... 벗을래..."
그 거대한 손이 기어코 츄리닝 바지춤을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결국 그의 바지 끝자락을 잡아당겨 주었다. 두꺼운 종아리를 지나 넙대대한 발끝으로 바지가 허물어지듯 빠져나갔다.
드러난 그의 하반신은 억센 근육으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내 시선이 탐욕스럽게 그의 은밀한 곳을 향하려던 찰나, 이성의 끈이 아슬아슬하게 팽팽해졌다.
'하... 미친놈아, 정신차려! 선은 넘지마!'
나는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짐승처럼 그를 덮칠지도 몰랐다. 좁고 가파른 다락 사다리를 기다시피 올라가, 대충 널브러진 이불 하나를 낚아채 내려왔다. 바닥에 반라로 누워 색색거리는 곰탱이의 몸 위로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씌운 뒤, 나는 도망치듯 3층을 빠져나왔다.
2층 내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고작 밤 11시. 그 난리를 치고, 내 인내심의 한계를 수십 번이나 시험했는데도 아직 자정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올 리 없었다. 그저 지독한 고요함이 온갖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그 거대한 육체가 내 바로 위에서, 내가 덮어준 이불을 덮고 숨 쉬고 있다는 생각에 아랫배가 뻐근하게 달아올랐다. 신경을 분산시키려 폰을 들어 유튜브를 켰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떠먹여 주는 쇼츠 영상들이 무의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30분쯤 더 지났을까.
딩동
적막이 감돌던 거실에 초인종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밤 12시. 이 시간에 우리 집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이 시간에도 예쟁이가 돌아다닐 리는 없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켜 현관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강병운?"
화면 속에는 병운이 서 있었다. 분명 아까 거실 바닥에 발가벗겨진 채로 널브러져 있던 인간이, 어느새 헐렁한 반팔 티셔츠에 낡은 반바지를 꿰어 입고 내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머리는 까치집을 한 채, 특유의 그 순박하고 억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렌즈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 도어록을 열었다.
"이 시간에 웬일입니까? 아까 완전히 뻗었..."
"아, 형님. 안 주무셨수?"
병운이 머쓱하게 웃으며 굵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술기운은 아직 조금 남아있는 듯 얼굴에 홍조가 띠었지만, 아까 내게 안겨 꽐라가 되었던 것보다는 훨씬 또렷한 눈빛이었다.
"안 자고 뭐 합니까? 술 깨니까 속이 쓰려서 그래요?"
"아뇨, 속은 괜찮은데... 분명 낮에 푹 자뒀거든요? 아까는 오랜만에 마신 술이 확 올라와서 잠깐 기절했던 건데,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정신이 좀 말짱해졌지 뭡니까. 씻고 나오니까 잠도 다 깨버렸고."
병운이 헤헤 웃으며 덧붙였다.
"아까 저 부축해서 올라오시느라 고생하셨죠? 눈 떠보니까 옷도 다 벗겨져 있고 이불도 덮여있던데... 형님이 다 해주신 거 아닙니까. 고맙기도 하고, 민폐 끼친 게 미안하기도 해서 그냥 내려와 봤수다."
그의 무구한 대답에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낮에 잠을 자둬서 체력이 남아도는, 그것도 막 샤워를 마치고 내려온 이 거대한 수컷을 내 현관문 앞에 세워두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바디워시 향이 그의 체취와 섞여 내 콧 속을 파고들었다.
"들어와요. 밖에서 그러고 서 있지 말고."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현관문을 넓게 열었다. 병운은 "아이고, 실례합니다" 하며 커다란 몸을 수그리며 내 집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비어있던 3층 그의 자취방과는 달리, 꽤 값나가는 가구들과 간접 조명으로 채워진 내 거실을 보며 그는 연신 눈을 굴렸다.
"냉장고에 캔맥주 있는데. 한잔 더 할래요?"
"어휴, 제가 형님 술 다 거덜 내는 거 아닙니까. 주시면 감사히 먹겠수다."
나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캔맥주 두 개를 꺼내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렸다. 늦은 밤, 적막을 깨기 위해 TV를 틀어놓았지만 볼륨은 낮춰두었다. 화면에선 의미 없는 심야 예능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우리 두 사람은 소파와 그 앞 러그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캔맥주를 부딪쳤다.
"근데 형님."
맥주를 반쯤 비웠을 때, 병운이 불쑥 입을 열었다. TV 화면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해 돌아왔다.
"혹시 뭐... 스포츠 마사지 자격증 같은 거 있수?"
"...네?"
"아까 제가 술김에 뻗어 있을 때, 형님이 제 가슴이랑 어깨 쪽 꾹꾹 눌러주지 않았수까. 어제가 물류센터 첫날이라 온몸이 뻐근해서 죽을 맛이었는데, 형님이 만져주신 데가 아주 시원하게 싹 풀렸더라고요. 손맛이 장난이 아니던데."
푸우웁!
나는 마시던 맥주를 그대로 뿜어버릴 뻔했다.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사레가 들려 미친 듯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켁, 쿨럭! 켁!"
"아이고, 형님! 괜찮수까?"
놀란 병운이 황급히 다가와 솥뚜껑만 한 손으로 내 등을 퍽퍽 토닥였다. 흑심을 품고 탐욕스럽게 주물렀던 내 은밀한 범죄 행각이 들통난 줄 알고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는데, 이 미련한 곰탱이는 그걸 그저 '친절한 이웃의 능숙한 스포츠 마사지' 쯤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등을 때리는 병운의 무식한 손길에 기침을 멈춘 나는, 눈물이 찔끔 고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저 순박하고 티 없는 눈동자. 나는 안도감과 동시에 묘한 자신감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바보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이거지.'
나는 목을 가다듬고, 남아있는 맥주를 한 모금 넘기며 아까보다 훨씬 뻔뻔한 얼굴을 장착했다.
"왜요? 시원했으면 더 주물러 줘요?"
"에이, 아닙니다. 형님도 하루 종일 수업하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제가 어떻게 감히..."
손사래를 치며 미안해하는 병운의 모습이 내 가학심을 묘하게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번지게 했다. 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우리 일이라는 게, 하루 종일 서서 떠들고 애들 기강 잡느라 항상 긴장 상태거든요. 그래서 강사들끼리는 어깨나 목이 돌덩이처럼 뭉치는 게 직업병이에요. 나도 하도 아파서 유튜브 같은 데 찾아보면서 혈 자리 누르고 근육 푸는 방법쯤은 다 꿰고 있죠."
"아... 하긴, 선생님들도 참 고생이 많네요."
"그러니까, 기왕 내려온 거 이리 와서 앉아 봐요. 낼모레 또 물류센터 나가서 박스 나르려면 근육 제대로 풀어둬야 할 거 아닙니까."
내 거듭된 권유에 병운은 내심 좋으면서도 못 이기는 척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부탁 좀 드리겠수다. 진짜 딱 어깨만."
그렇게 말하더니, 병운이 갑자기 훌렁 하고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어 던졌다.
"아? 아니 옷은 왜 벗어 던지고 그래요?"
순식간에 내 시야에 가득 찬 그의 거대한 맨등과 태평양처럼 넓은 어깨에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까는 미등 아래서 정신없이 봤다지만, 지금은 환한 거실 조명 아래서 그의 근육 결 하나하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내가 놀라서 굳어버리자, 병운은 두꺼운 팔로 제 가슴팍을 슬쩍 가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제가 원래 집에서 옷 입고 있는 걸 답답해해서... 혹시 옷감이 손에 거슬리면 제대로 안 짚어질까 봐 벗은 건데, 보기 불편했슴까? 다시 입을까요?"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티셔츠를 다시 집어 드는 그 거대한 사내의 모습이, 나는 난생처음으로 귀엽게 느껴졌다. 징그러운 내 욕정을 채우기 위한 짐승이 아니라, 그냥 덩치만 큰 순한 대형견 한 마리가 내 거실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음험하고 끈적했던 내 마음 한구석에, 맑은 물이 한 방울 톡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변태적인 미소 대신, 진심으로 어이없고 편안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뇨, 됐어요. 그냥 벗고 있어요. 그게 나도 편하겠네."
나는 티셔츠를 내려놓은 병운을 내 소파 앞 러그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게 했다. 나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자연스럽게 그의 넓은 양어깨 위로 두 손을 올렸다.
손바닥 가득 전해지는 그의 뜨거운 체온과,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뭉친 승모근의 감촉. 나는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의 굳은 근육을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짓누르기 시작했다.

"우움... 아, 형님. 거기 진짜 시원하네요."
병운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기분 좋은 신음을 내뱉었다.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의 굵은 목덜미 아래로 근육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맨살을 만지고 있지만, 내 마음은 아까 전처럼 미친 듯이 요동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묘할 정도로 차분해져 있었다. 거실을 채우는 TV의 백색소음, 손끝에서 전해지는 이 남자의 우직한 삶의 무게, 그리고 "시원하다"며 나를 전적으로 믿고 몸을 맡긴 무구한 등판.
나는 이 순박하고 다정한 사람과 아주 오래도록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졌다.
내가 나의 추악한 본능에 잡아먹혀 이 남자를 덮친다면, 그는 놀라 달아날 것이고(달아나기 전에 내가 먼저 십분 두들겨 맞을지 모르지) 나는 다시 그 끔찍한 고독 속으로 처박혀야 할 것이다. 나는 묵묵히 병운의 어깨를 주무르며, 내 안에서 날뛰는 이 짐승 같은 욕망에 튼튼한 목줄을 채우기로 다짐했다.
'그래, 철저하게 숨기자.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원히 모르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형이자, 든든한 이웃으로. 그렇게라도 이 따뜻한 온기를 내 곁에 오래오래 묶어둘 수만 있다면, 이깟 욕정쯤은 평생 억누르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형님."
어깨를 주무르던 내 손길이 멎고 거실에 짧은 정적이 찾아왔을 때, 노곤하게 풀어진 병운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왜요. 덜 풀렸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요. 형님이 저한테 계속 꼬박꼬박 말씀을 높이시니까, 왠지 모르게 자꾸 벽이 쳐져 있는 것 같아서요. 제가 한참 어린 놈이 주제넘게 구는 건 알겠는데, 기왕 동생 하기로 했으면서 계속 존대받는 게 영 불편하고 죄송스럽습니다. 말씀 좀 편하게 낮춰주시면 안 됩니까?"
거실의 간접 조명 아래, 나를 올려다보는 병운의 표정은 퍽 진지했다. 나를 완벽하게 무해한 이웃이자 친근한 '형'으로 대하겠다는, 그 우직한 쐐기표. 나는 무릎 위로 늘어뜨린 내 두 손을 꽉 말아 쥐며 애써 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완벽한 '형'의 탈을 쓰는 것이 내 추악한 본능을 숨기기에 가장 안전한 방패막이가 될 테니까.
"그래요... 아니지. 그래, 알았어."
내 입에서 처음으로 반말이 흘러나오자, 병운의 입가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오, 진작 그렇게 부르시지! 훨씬 듣기 좋수다, 형님."

우리는 이야기를 더 나누다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번호를 교환했다. 액정 화면에 '3층 강병운'으로 저장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 견고했던 고독의 성벽 안에 이 미련하고 다정한 짐승의 자리를 공식적으로 내어주었음을 실감했다.
그날 이후, 우리의 관계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하고 편안한 궤도에 안착했다.
서로 출퇴근과 생활 패턴이 판이하게 달랐기에 매일 얼굴을 마주할 순 없었다. 나는 주로 늦은 오후에 학원으로 출근해 9시나 10시가 다 되어 퇴근했고, 병운은 주 4일간 성실히 일한 덕에 야간 물류센터 근무일이 5일로 늘었고 그렇게, 거의 매일 출근해 밤을 새우고 낮에는 부족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우리는 틈틈이 카톡이나 전화로 시답잖은 안부를 나눴다.
[형님, 오늘 비 오는데 우산 챙기셨수?]
[어. 너도 센터 바닥 미끄러울 텐데 발목 조심해라. 괜히 무리해서 박스 두 개씩 들지 말고.]
[에이, 제 덩치에 한 개씩 들면 반장님한테 욕먹습니다 ㅋㅋㅋ 다녀오겠수다!]
투박한 이모티콘과 함께 온 답장을 보며 나는 학원 교무실 의자에 앉아 실없는 웃음을 흘리곤 했다.
하지만 병운이 쿠팡으로 출근하는 날, 자정이 넘어 퇴근해 돌아온 내 2층 집은 끔찍할 정도로 고요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만 미세하게 윙윙거릴 뿐, 3층은 쥐 죽은 듯 적막했다. 처음 이 빌라를 계약했을 때 내가 그토록 원했던, 바로 그 완벽한 무균실 같은 평화였다.
그런데 참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고요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면, 묘하게 명치가 허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이 미련한 곰탱이는 지금쯤 땀 뻘뻘 흘리며 무식하게 박스나 나르고 있겠지.'
혼자 궁상맞게 자다 보면 위층이 고요할 틈을 줬어야지, 라며 타박했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제는 그 100kg짜리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 오히려 퀸사이즈 침대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뗏목처럼 위태롭고 넓게 느껴졌다.
머리맡에 둔 폰의 액정을 켰다 끄기를 반복했다. 바쁘게 일하고 있을 놈에게 방해될까 봐 [힘드냐]는 짧은 톡 하나 보내지 못하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내 꼴이 우스웠다. 그렇게 의미 없는 인터넷 기사나 뒤적이며 뒤척이다가, 이른 새벽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올 무렵 현관문 밖 계단에서 '쿵, 쿵, 쿵' 하는 익숙하고 둔탁한 진동이 울리면 그제야 메말랐던 숨통이 트였다.
철컥, 하고 302호 문이 닫히고, 내 머리 위 천장으로 그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몇 번 오가다 이내 멈춘다. 나는 그 무거운 진동을 자장가 삼아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그가 씻을 때 천장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소리가 들릴 때야 말로 나에겐 깊은 잠에 이르는 완벽한 층간소음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났다.
그날도 밤 10시가 넘어 11시가 가까워 지는 늦은 시간이었다.
학원에서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하고 파김치가 되어 빌라 공동현관을 들어서는데, 계단 위쪽에서 매캐한 담배 냄새와 함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씨발, 강병운 이 새끼는 밤마다 어디 기어 나가서 안 들어오는 거야. 배를 째버릴라."
2층과 3층 사이 계단 참. 덩치 큰 사내 둘이 쪼그려 앉아 바닥에 침을 뱉고 있었다. 며칠 전 아침, 병운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그의 오른쪽 다리를 덧나게 했던 바로 그 사채업자들이었다. 야간 물류센터에 나간 병운이 집에 있을 리 만무했으니 놈들은 허탕을 치고 독이 올라 있었다.
순간, 피곤에 절어있던 내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씨발, 담배 안 꺼? 남의 집 문 앞에서 뭐 하는 짓들입니까!?"
내 차가운 목소리에 사내들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2층 아저씨. 미안하게 됐수. 아니 윗집 새끼가 돈을 빌려 가고 하도 안 갚아서 얼굴 좀 보려고 기다리는데 코빼기도 안 비치네."
놈들의 비아냥거리는 입매를 보는 순간, 밤새 무거운 박스를 나르며 땀 흘리고 있을 병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번 돈이 고스란히 저 쓰레기 같은 놈들의 유흥비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위산이 역류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폰을 꺼내 들며 낮게 읊조렸다.
"강병운 씨 빚, 원금에 그 씨발라먹을 이자까지 다 합쳐서 정확히 얼마입니까."
"예? 아니, 2층 아저씨가 그 새끼 돈은 왜 알고 싶은건데?"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왜? 대신 갚기라도 해 주게?"
"군소리 말고 얼만지나 말해."
내 서슬 퍼런 기세에 사내 하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원금에 연체 이자까지 싹 털면 2천 조금 넘는데. 우수리 떼고 딱 2천."
내 통장에는 새 차로 모델 Y라도 한 대 뽑을까 싶어 적금으로 꽤 많 모아뒀던 5천만 원의 예비 자금이 있었다. 급하게 차를 바꿀 필요도 없었고, 무엇보다 지금 내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곰탱이의 짓눌린 어깨를 펴줄 수만 있다면 그깟 쇳덩어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말도 안 되는 고금리 이자에 허덕이며 평생 내 밑에서 갉아먹히느니, 차라리 내 돈을 빌려 내 옆에서 갚아나가는 게 나았다. 그것이 내가 병운에게 채울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합법적인 '목줄'일 테니까.
"계좌번호 부르세요. 그리고 강병운 씨 이름으로 된 차용증이랑 서류, 당장 내놓고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 자리에서 핸드폰 뱅킹을 켜 2천만 원을 이체했다. 허탈할 정도로 간단한 터치 몇 번에, 놈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서류 봉투를 내밀고는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병운의 도장이 찍힌 낡은 차용증을 손에 쥐고, 어둠이 깔린 3층 병운의 집 문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다음 날 오전 8시.
거실 소파에 앉아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현관문이 부서져라 울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쾅쾅쾅쾅!!
"형님!! 정민후 형님!! 문 좀 열어보십서!!"
인터폰 화면에는 밤샘 노동을 마치고 막 돌아온 듯한 병운이,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사채업자들에게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내가 도어록을 열자마자, 병운이 거대한 몸을 들이밀며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넙대대한 손에는 구겨진 서류 종이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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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다정하고 순박했던 평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낮고 거칠게 떨리는 음성. 병운의 가슴팍이 미친 듯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동네 떠나가게 무슨 소리야. 들어와서 앉아."
"앉게 생겼수까 지금?! 형님이 왜... 도대체 형님이 왜 그 쓰레기 새끼들한테 돈을 줍니까! 제가 언제 갚아달라고 했어요, 예?!"
병운의 분노는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빚을 대신 갚아준 것에 대한 미안함이 아니었다. 한 번도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제 몸을 갉아먹어가며 버텨왔던 그의 알량하고도 우직한 자존심이 통째로 짓밟혔다는 비참함이었다.
"그럼 그 미친 이자를 평생 감당할 작정이야? 쿠팡에서 뼈 빠지게 박스 날라서 언제 그 돈을 다 갚아! 다리도 성치 않은 사람이."
내 정곡을 찌르는 말에 병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큰 손으로 제 마른세수를 하더니,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형님이 나한테 어떤 사람인데... 그냥 좀 모자라도, 열심히 사는 동생 놈이고 싶었는데...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듭니까. 왜 나를 형님 돈이나 뜯어먹는 불쌍한 새끼로 만들어요, 왜!"
그의 눈가에 결국 벌건 핏발과 함께 눈물이 고였다. 미련할 정도로 착해 빠져서 그 빚을 떠안고도 허허 웃던 남자가, 내 호의 앞에서는 자존심이 상해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젖은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나는 그를 구원한 게 아니라, 그의 가장 약한 밑바닥을 강제로 들춰낸 것이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분노와 수치심에 떨고 있는 그의 단단한 어깨를 꽉 쥐었다.
"병운이 네가 나한테 왜 비참해? 내가 널 동정해서 그 돈을 건네준 것 같아? 어차피 차 모으느라 남는 돈이었어! 그거 좀 쓴 게 어때서?"
"......"
"나는 내 이웃이! 아니 내 동생 하기로 한 놈이 그딴 쓰레기들한테 굽신거리는 꼴 보는 게 죽기보다 싫었을 뿐이야. 그 돈 나한테 갚아. 이자 안 받을 테니까, 도망가지 말고 내 옆에서, 내 눈앞에서 천천히 다 갚으라고."
병운은 내 손아귀에서 파르르 떨었다. 나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안기지도 못한 채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짐승처럼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의 굵은 목울대가 거칠게 일렁이더니, 기어코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병운은 내 어깨를 쥐고 있던 내 두 손목을 그의 크고 투박한 손으로 꽉 부여잡았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체온이 맞닿았다.
"형님은... 진짜 잔인하구만"
갈라진 목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갈랐다. 내 손목을 쥔 병운의 악력에 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그의 젖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 안에는 단순한 수치심이나 원망이 아닌,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깊고 처절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미친놈처럼 구는지... 형님은 모릅니다. 세상천지 다 나를 멍청한 등신 취급하고 짐짝 취급해도, 그냥 허허 웃고 넘겼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형님입니까."
"강병운!"
"딴 놈들한테는 병신같이 보여도 상관없는데, 형님 앞에서는... 형님한테만큼은 번듯하고 좋은 사람이고 싶었단 말입니다! 근데 내 바닥을, 제일 초라하고 구질구질한 밑바닥을 왜 다른 사람도 아닌 형님이 보게 만드냐고요..."
병운의 고개가 힘없이 꺾이며 내 어깨 위로 툭 무너져 내렸다. 내 셔츠 자락을 꽉 쥔 그의 커다란 주먹이 아이처럼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발밑까지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그건 단순히 친한 동생으로서의 치기가 아니었다.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자신의 초라함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유일한 사람. 이 우직하고 미련한 곰탱이는 나를 제 세상의 중심에, 그것도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으로 몰래 세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는 그의 거대한 등을 내려다보았다. 이 남자는 이미, 스스로 나에게 가장 질기고 단단한 감정의 목줄을 내어주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땀에 젖은 병운의 굵은 뒷목을 천천히 감싸 안았다.
"괜찮아. 나한텐 안 번듯해도 돼. 아니 이미 충분히 멋진 동생이야. 그러니까... 그냥 내 옆에 있어."

창밖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 두 남자의 그림자가 하나로 엉켜붙고 있었다.
내 셔츠 어깨춤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100kg이 넘는 전직 유도 선수가, 밤새 물류센터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고 온 거대한 사내가 내 품에 무너져 내려 어린애처럼 끅끅대며 울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넓고 단단한 등을 크고 느리게 쓸어내렸다. 그의 몸에서 옅은 땀 냄새와 먼지 냄새, 그리고 불덩이 같은 체온이 훅 끼쳐왔지만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짐승처럼 앓던 병운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다 큰 사내놈이 남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부끄러워졌는지, 그가 흠칫하며 내 어깨에서 몸을 떼어냈다.
"크흠... 죄, 죄송했수다. 제가 밤새 잠을 못 자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벌겋게 짓무른 눈가와 눈물범벅이 된 뺨을 커다란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는 꼴이 영락없는 대형견이었다. 방금 전까지 자존심이 상해 불같이 화를 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내 셔츠 어깨에 남은 커다란 눈물 자국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미련한 곰탱이만 남아있었다.
"형님, 아니, 형... 옷 다 젖어서 어쩝니까. 벗어주시면 제가 빨아다 드릴..."
"됐어. 땀 냄새나는 네 티셔츠에 내 얼굴 처박고 계단 올라왔던 거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진짜 죄송합니다..."
"죄송한 거 이제 알았어? 어디 지금 하늘같은 형한테 말야..."
반 농담조로 무심하게 툭 내뱉자, 병운이 훌쩍거리며 머쓱하게 굵은 뒷목을 긁적였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소파 앞 러그를 가리켰다.
"앉아."
"예?"
"앉으라고. 다리도 아픈 놈이 밤새 서서 일해놓고 계속 서 있을래?"
병운이 쭈뼛거리며 소파 끄트머리에 커다란 엉덩이를 조심스레 걸쳤다. 나는 주방으로 가 시원한 생수 한 병을 꺼내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마셔. 울어서 수분 다 빠졌겠다."
"아이 참... 고맙수다."
병운이 얌전히 물병을 받아 단숨에 반 병을 비워냈다. 꿀꺽거리는 굵은 목울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는 거실 서랍장에서 펜과 이면지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차용증 다시 써."
"형..."
"이자는 됐어. 원금 2천만 원. 매달 네가 쿠팡에서 벌든 어디서 벌든, 무리하지 않고 갚을 수 있는 액수 정해서 매월 며칠에 입금할 건지 적어. 기한은 네가 다 갚을 때까지 무기한 연장해 줄 테니까."
병운의 커다란 두 눈이 다시금 일렁였다.
"아 빨리. 그냥 1금융권 은행 대출로 갈아탔다고 생각해 임마."
"아 예..."
"그리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무, 무슨 조건입니까. 형이 시키는 건 다 하겠수다."
"다시는 빚 갚는답시고 몸 상하게 투잡, 쓰리잡 뛰면서 궁상떨지 마. 그리고..."
나는 테이블을 짚고 몸을 숙여, 소파에 앉은 병운과 눈높이를 맞췄다. 여전히 붉은 기운이 남은 그의 까만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고스란히 비쳤다.
"나한테 번듯해 보이고 싶었다며. 그러니까 내 눈앞에서, 내 옆에서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자면서 번듯하게 갚아. 딴 데로 새지 말고. 알았어?"
병운의 얼굴이 펑 터질 듯 달아올랐다. 자신이 아까 홧김에 내뱉었던 그 진심을 내가 정확히 짚어내자,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는 솥뚜껑만 한 두 손으로 제 붉어진 얼굴을 푹 감싸 쥐더니, 모기만 한 소리로 웅얼거렸다.
"...알겠수다. 진짜, 뼈가 부서져도 갚을 테니까... 형 옆에 딱 붙어서 갚겠습니다."
그 묵직하고도 순종적인 대답에, 나는 비로소 참았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이 미련한 곰탱이의 우직한 마음과 육체를 내 곁에 합법적으로 묶어둔, 완벽한 승리의 아침이었다.

서비스샷
우리 병운이 솥뚜껑 손 샷을 많이 원하는 것 같아서.
아 그리고,
병운이랑 천천히 달달하게 오래 갈거니 너무 급발진스럽게 도파민 터지는 건 기대하지 말어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