층간소음 분노조절잘해된 썰 (12편)
12편. 해장국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병운이는, 오는 길에 넘어진 건지 뒹군 건지 손등에 생채기가 나 있고 옷도 꽤 지저분해져 있었다. 게다가 꽉 막힌 거실에 에어컨도 안 틀어져 있어서, 그 커다란 몸이 땀에 푹 절어 무척이나 더워 보였다.
'아휴 아무리 100kg 넘는 곰탱이라 감당하기 버거웠다지만, 사람을 이렇게 툭 던져둬 버리고 가면 어떡하냐.'
덩그러니 널브러진 녀석의 꼴을 보며 속으로 작게 혀를 차던 나는, 이내 멈칫했다. 민철이 야속하다는 짧은 원망은 곧 부끄러운 깨달음으로 바뀌었다.
거실 바닥에 깔려있는 매트리스에 녀석을 곱게 눕혀주고 에어컨을 틀어줄 여유조차 없이, 민철은 곧장 아래층 우리 집으로 뛰어 내려왔던 것이다. 며칠째 죽상을 하고 술통에 빠져 지내는 친구가 얼마나 짠하고 덜컥 겁이 났으면, 어떻게든 꼬인 실타래를 풀어주려고 염치 불고하고 나부터 찾아왔을까. "이 새끼도 그 인연에 참 깊이 진심이었나 봐요."라며 민철이 내뱉었던 씁쓸한 한숨의 무게가 뒤늦게 가슴을 쳤다.

나는 끙끙대며 녀석이 입고 있던 양말을 벗기고, 웃통을 벗고 자는 걸 좋아하는 녀석의 습관을 알기에 윗옷도 조심스레 벗겨주고, 편하게 자라고 바지도 벗겨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 우람한 맨몸을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아찔한 욕정이 돌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이 바닥에 무너져 있는 미련한 곰탱이를 보면 볼수록 미치도록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욕실에서 수건에 찬물을 적셔 꽉 짜낸 뒤, 흙먼지가 묻은 녀석의 커다란 손과 땀에 젖은 몸을 천천히 닦아내려갔다. 그러다 문득, 녀석과 친해지고 처음 함께 고깃집에 갔던 그 날이 떠올랐다.
손끝에 닿는 상처투성이 몸을 쓸어내리며, 나는 이 미련한 곰탱이가 살아온 삶이 어땠을지, 그간 들어왔던 파편 같은 조각들이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한때는 녀석이 나약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살면서 이런저런 아픈 일과 역경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법인데, 이렇게 나이도 창창하고 타고난 피지컬도 훌륭한 녀석이 왜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삶을 반쯤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온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말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완벽하게 이해가 갔다.
녀석은 이미 스물네 살의 그 가을에, 자신에게 너무나 큰 의미였던 세계 하나를 통째로 잃어버린 것이다. 그 끔찍한 상실 이후로 앓으시던 어머니마저 잃고, 험한 현장에서 일하다가도 치형과 비슷한 어린 녀석만 보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해 툭하면 직장을 잃었을 테지. 남들에겐 그저 살면서 겪는 소소한 불행일지 몰라도, 이미 밑바닥까지 부서져 본 녀석에겐 무언가를 또 하나씩 잃어간다는 게 남들보다 수십 배는 더 큰 고통이자 공포였을 것이다.
누군가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겁이 없다고들 하지만, 틀렸다. 내 눈앞에 쓰러져 있는 이 사내는, 더 이상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아 온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는 한없이 가련한 남자였다.
아, 그간 나의 찌질한 행동들이 떠올라서 어느 순간 눈물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 알면 알수록, 내 좁아터진 마음에 어떻게든 이 녀석을 받아들여보고 싶어서, 나 스스로가 조금 더 가슴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고 싶었다.

"형님..."
잠기다 못해 쩍쩍 갈라진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녀석은 내 손목을 쥔 커다란 손에 덜덜 떨릴 정도로 힘을 주며, 마치 길을 잃고 버림받은 아이처럼 처절하게 중얼거렸다.
"가지 맙서... 형님마저 나... 버리지 맙서..."
쿵, 하고 발밑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를 붙잡은 녀석의 손아귀는 뼈가 으스러질 듯 강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건 거대한 사내의 힘이 아니라 벼랑 끝에 매달린 자의 가장 나약하고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수다... 푸후..."
짐승처럼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로 녀석이 일그러진 얼굴로 울음을 삼켰다. 잘못한 건 유치하게 자존심을 세우며 며칠이나 녀석을 투명 인간 취급했던 나인데, 이 미련한 곰탱이는 무의식의 밑바닥에서조차 자신이 버림받을 짓을 했다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토록 무서워했던 '상실'이 나로 인해 또다시 반복될까 봐, 알코올로 범벅이 된 뇌로도 필사적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가슴속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현관을 향해 내디뎠던 발걸음을 돌려, 다시 녀석의 곁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내 손목을 생명줄처럼 꽉 틀어쥐고 있는 녀석의 커다란 손등 위로, 내 양손을 포개어 다정하게 덮어주었다.
"안 가... 아무 데도 안 가."
내 목소리도 어느새 물기를 머금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손을 살며시 풀어내어 내 뺨에 가져다 대며, 그 거칠고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내가 미안해. 네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형이 다 미안해..."
내 뺨을 쓸어내리는 녀석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감겨 있던 녀석의 붉은 눈동자에서 기어이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주르륵 흘러내려 관자놀이를 타고 베개 위로 스며들었다. 내가 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 주자, 병운은 쥐고 있던 힘을 스르륵 풀며 다시 깊은 숨을 내쉬었다.
"흐으..."
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잠이 든 듯 편안한 숨소리로 변해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대신 조금 전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던, 녀석이 '남자라는 이유로' 치형의 고백을 어떻게 모질게 쳐냈는지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접어버렸다.
지금 내 눈앞에 쓰러져 있는 건,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해서 밀어내야 할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스물네 살의 가을밤에 갇혀 피눈물을 흘리며, 단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 처절한 고독을 함께 나눠 가질 온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가련한 영혼일 뿐이었다.
치형이 제 허리를 껴안고 자도, 그저 살가운 동생이라 여기며 밀어내지 않았던 녀석의 무구하고 미련한 다정함. 그 다정함의 그림자 뒤에 숨어서, 나 역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가여운 짐승에게 가장 안전하고 이타적인 위로를 건네줄 '형'으로 남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나중에 들킬, 비겁하고 은밀한 용기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녀석이 덮고 있던 얇은 이불 안으로 조심스레 몸을 밀어 넣었다. 좁은 싱글매트리스 위, 나는 그 거대한 몸통에 내 몸을 바짝 밀착시킨 채 녀석의 두꺼운 팔을 끌어와 내 허리에 둘렀다. 제주도의 그 킹사이즈 침대에서 녀석이 내 등 뒤에 몸을 기댔던 것처럼, 이번엔 내가 녀석의 넓은 품 안으로 파고들어 단단한 가슴팍에 귀를 맞댔다.

쿵, 쿵, 쿵.
술과 열기에 취해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는 녀석의 심장 소리가, 꼭 나를 향해 살려달라고 외치는 구조 신호처럼 들렸다.
"형 여깄어. 푹 자. 이제 괜찮아."
나는 녀석의 단단한 등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일정한 박자에 맞춰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이 미련한 수컷의 체취와 후끈한 열기가, 지금은 내 세상에서 가장 애틋하고 유일한 안식처로 다가왔다.
병운은 내 어깨에 허리를 감은 팔에 무의식적으로 꽉 힘을 주며, 무거운 머리를 내 머리 위에 기댄 채 다시 깊고 까마득한 수면에 빠져들었다. 나를 꾹 눌러주는 그 안정감이 너무 좋았다.
나는 녀석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오래도록 그 어두운 거실에서 눈을 감지 못한 채 녀석을 안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잃게 하지 않겠다고, 이 가련하고 다정한 짐승의 세상은 내가 지켜주겠다고 묵묵히 다짐하면서.
하지만 지켜주겠다던 나의 포부와 달리, 오히려 내 옆에 병운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나에게도 그는 '위로'였다.
원래 나의 완벽했던 계획은 이러했다.
동이 틀 무렵쯤 일찍 일어나서, 위층 내 집으로 올라가 시원하고 깔끔하게 콩나물국을 끓여 내려오는 것. 그래서 간밤에 속이 다 뒤집어졌을 이 미련한 곰탱이의 속을 따뜻하게 달래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른스럽게 마주 앉아 오해를 푸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완벽하게 실패했다. 새벽 내내 녀석의 묵직한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토닥이다가, 어느 순간 나조차도 까무룩 깊은 잠에 빠져버린 탓이다. 평소엔 불면증에 시달릴 만큼 예민한 편인데, 녀석의 뜨겁고 거대한 품 안은 묘하게도 세상의 모든 소음을 차단해 주는 완벽한 방공호 같았다.
"음..."
눈가에 닿는 따가운 햇살에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 그리고 내 시야를 꽉 채우고 있는 녀석의 넓은 가슴팍이었다. 밤새 뒤척인 탓인지 내 머리는 녀석의 단단한 팔베개 위에 얹혀 있었고, 녀석의 다른 한 팔은 내 허리를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더 위로 올린 순간, 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병운은 이미 깨어 있었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건지, 녀석은 고개를 반쯤 숙인 채 또렷한 그 눈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게 충혈되어 있던 어젯밤의 위태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맑게 가라앉은 까만 눈동자 속에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놀람, 안도감, 미안함, 그리고 감히 내가 전부 헤아릴 수 없는 지독한 애틋함.
"...깼수까?"
정적이 흐르는 거실, 녀석이 먼저 갈라진 목소리로 정적을 깼다. 평소라면 기겁을 하며 "형님! 제가 미쳐서 술김에 형님을 안고 잤나 봅니다!" 하고 화들짝 떨어져 나갔을 녀석인데, 병운은 내 허리를 감은 팔을 전혀 풀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제 품으로 조금 더 당겨 안으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내 뒷머리를 아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이거... 꿈 아니죠?"
"꿈은 무슨. 속은 좀 어때."
내 무심한 대답에 병운의 커다란 가슴이 한 번 크게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녀석은 내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듯 얼굴을 묻으며, 아주 작게, 물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님이... 또 나 버리고 가버린 줄 알았수다. 아침에 눈 떴을 때, 또 나 혼자일까 봐... 눈뜨기가 무서웠는데."
"내가 안 간다고 했잖아."
나는 이불속에서 손을 빼내어, 녀석의 넓은 등판을 툭툭 두드려주었다.
"일찍 일어나서 속 풀리게 콩나물국이나 시원하게 끓여주려고 했는데. 이 여름에 네 품이 하도 따뜻해서 늦잠 자버렸네."
내 담담한 농담에, 병운이 픽 하고 작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나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은 채,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꼼짝하지 않았다. 거실 창밖으로 매미 우는 소리가 평화롭게 울려 퍼지는, 병운의 품에서 깬 두 번째 아침이었다.
녀석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그제야 뒤늦은 현실 감각이 밀려왔다. 벌건 대낮의 아침 햇살 속에서, 반라 상태나 다름없는 거대한 사내의 품에 파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나는 멋쩍은 기분에 헛기침을 하며, 내 허리를 감고 있는 녀석의 단단한 팔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이제 그만 일어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 몇 시지? 나 오늘 출근해야 하거든."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주변에 떨어져 있던 내 휴대폰을 찾으며 시선을 피했다.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하니, 여유를 부릴 틈도 없이 당장 씻고 나가야 할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나는 애꿎은 입술만 꾹 깨물었다. 속이 상했다.
'아씨, 일찍 일어나서 시원하게 콩나물국 끓여주면서 폼 좀 잡으려고 했는데. 하필 녀석 품에서 늦잠을 자버릴 게 뭐람.'
간밤에 술을 그렇게나 퍼마셨으니 지금쯤 속이 말이 아닐 텐데. 뜨끈한 국물 한 그릇 못 먹이고 이대로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려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병운은 내가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텅 빈 품을 낯설게 내려다보더니,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숙취가 이제야 몰려오는지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버림받은 대형견 같았다.
"벌써... 가시게요?"
아직 갈라진 목소리에 묻어나는 옅은 아쉬움과 불안함.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녀석의 티셔츠를 주워다 녀석의 무릎 위에 던져주며, 짐짓 덤덤한 척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응. 알잖아. 방학 때 오전 수업 있는 거, 시간이 없네. 콩나물국도 끓여주려고 했는데..."
"아... 형님, 저는 괜찮수다..."
"괜찮긴. 얼굴이 이렇게 허연데."
나는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 거실 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불안한 시선이 여전히 내 발끝을 맴돌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 문을 나서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사람인 것처럼.
나는 옅은 한숨을 쉬며 다시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릎을 굽혀 녀석과 눈높이를 맞춘 뒤, 아직 열기가 남은 커다란 뺨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감싸 쥐었다.
"병운아."
늘 '강병운' 하고 딱딱하게 부르던 것과 달리, 낮고 부드럽게 부른 이름에 녀석의 커다란 어깨가 움찔했다.
"나 퇴근할 때까지 어디 가지 말고 푹 쉬고 있어. 속 쓰리다고 거르지 말고 뭐라도 꼭 챙겨 먹고. 응?"
타이르듯 다정한 내 목소리에, 병운의 잘게 흔들리던 동공이 일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투명하게 젖어 들어갔다. 녀석은 내 손길에 커다란 뺨을 기댄 채, 굳게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아주 편안하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예, 형님.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수다."
출근 후
아이들이 삐뚤빼뚤하게 답을 채워 넣은 서술형 답안지 위로 붉은 비가 내렸다. 몇 번이나 밑줄을 긋고 교정 부호를 달았지만, 활자들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은 채 허공으로 흩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결국 쥐고 있던 빨간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눈을 비벼댔다. 하루 종일, 정말이지 단 1분도 쉬지 않고 머릿속이 요동쳤다. 내 이성과 감정은 안전바가 흔들리는 월미도 바이킹을 타듯 끝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민철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던 과거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보았다. 자신을 남몰래 안고 자던 치형을 한 번도 밀어내지 않았던 녀석의 둔감함. 그리고 어젯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헐떡이며 내 손목을 옭아매던 절박한 악력.
그 파편들을 모아두고 보면 분명 희망적인 가설이 세워졌다. 하지만 나는 평생을 움츠러든 채 방어적으로 살아온 서툰 어른이었다. 상처받기 두려운 내 오랜 방어기제는 끊임없이 최악의 수들을 던지며 나를 괴롭혔다.
'그 녀석이 정말 남자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아니, 그저 천성이 미련할 정도로 정이 많아서, 제게 다가오는 온기를 차마 내치지 못하는 범인류애적인 다정함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치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알량한 부채감 때문에, 내키지 않는 스킨십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거라면.'
생각이 끝없는 심연으로 곤두박질치려 할 때마다, 나를 다시 건져 올린 건 감각의 기억이었다.
아침 햇살 속에서 눈을 떴을 때, 나를 제 품에 가두듯 빈틈없이 끌어안고 있던 그 거대하고 뜨거운 팔뚝. 내 뒷머리를 부서질 듯 소중하게 감싸 쥐던 투박한 손바닥. 그리고 내 머리칼에 뺨을 비비며 뱉어내던, 안도감에 젖은 그 짐승 같은 숨결.
아무리 미련하고 착해 빠진 사내라도,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동성을 그토록 절박하게 끌어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건 온전히 나라는 존재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벌거벗은 진심이었다.
그 압도적인 체온을 복기할 때마다 등줄기로 찌릿한 소름이 돋으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동시에, 꽉 막혀 있던 명치끝이 뻐근해지면서 미칠 것 같은 설렘이 밀려왔다.
그래. 더 이상 헷갈려 하며 도망치지 말자.
그 미련한 곰탱이가 온몸으로 내어준 다정함을 핑계 삼아, 나도 이제는 조금 대놓고 희망이란 걸 품어보고 싶어졌다. 아니, 이미 내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그 거대한 바다를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퇴근을 알리는 시계 방향이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학원을 빠져나왔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차를 갖고 왔는데, 액셀을 밟는 발끝에는 전에 없던 조급함과 묘한 부력이 실려 있었다.
집 주변 길가에 차를 대고 공동 현관을 지나치는 내내 내 심장 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2층, 나의 고요하고 안전했던 세계. 나는 굳게 닫힌 내 집 현관문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나쳐 곧장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익숙하게 도어록 커버를 올리고, 이제는 내 심장에 깊게 각인된 여덟 자리의 숫자를 꾹꾹 눌렀다.
띠리릭-
묵직한 철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건, 어젯밤 녀석의 절망을 대변하던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아니었다. 볕에 잘 말라 바스락거리는, 달콤하고 뽀송한 섬유유연제 향기였다.
"...?!"

나는 현관에 선 채로 작게 탄성을 삼켰다. 거실 한가운데, 100kg가 훌쩍 넘는 그 거대한 사내가 커다란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수건을 개고 있었다. 제 손바닥만 한 수건의 각을 맞추겠다고 꼬물거리는 그 크고 듬직한 뒷모습이 어찌나 비현실적이고 사랑스러운지, 하루 종일 나를 짓누르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순간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현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녀석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녀석의 얼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환하고 무구한 기쁨이 번져갔다.
"형님! 오셨수까."
아침의 그 초췌하고 불안했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한결 편안하고 단정해진 녀석이 개켜둔 빨래를 옆으로 밀어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지극히 일상적이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배 안 고픕니까? 저녁 챙겨드릴까요?"
저녁 메뉴를 묻는 그 평온한 물음에 대답할 틈도 없이, 녀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려 내 몸을 제 품속에 가득 끌어안았다. 아침에 느꼈던 결사적인 옭아맴과는 완전히 다른 질감의 포옹이었다.
불안이나 절박함, 과거의 그림자 같은 건 완벽하게 걷어낸 채, 그저 하루의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나의 안위를 묻고 환영하는 포옹. 지극히 편안하고 무해한, 일상의 위로였다.
내 어깨를 빈틈없이 감싸 안는 녀석의 두꺼운 팔과, 내 뺨에 닿는 넓은 가슴팍의 온도는 말도 안 되게 따뜻했다. 나는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눈을 감고 녀석의 단단한 허리에 마주 팔을 둘렀다. 이토록 벅차고 평온한 온기 속에서, 문득 치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 이런 따스함이었을까.'
평생을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서 삭막하게 살아왔을 스물네 살의 치형이, 수많은 상처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이 미련한 사내에게 제 삶을 내던지고 싶어졌던 이유.
거칠고 투박해 보여도 그 속은 한없이 맑고 다정해서, 한 번 이 품에 발을 들이고 나면 영영 빠져나갈 방도를 잃게 만드는 녀석의 이 압도적인 온도 때문이었겠지.
규칙적으로 뛰는 녀석의 묵직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는 치형이 느꼈을 그 지독한 사랑의 이유를, 그리고 나 역시 영락없이 녀석이라는 바다에 속절없이 잠식되어 버렸음을 온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루 종일 학원 책상머리에 앉아 혼자 수없이 짓고 부수었던 그 모든 의심과 고민들이, 이 맹목적이고 무해한 온기 앞에서 얼마나 작고 얄팍한 것이었는지가 사무치게 깨달아진 것은.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죄책감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녀석의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가 묻힌 제주 바다로 억지로 끌고 갔던 나의 오만함. 치형이라는 이름 앞에서 어리광 같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차마 아물지도 못한 녀석의 흉터에 다시 잔인하게 생채기를 내버린 나의 옹졸함. 그 얄팍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어떻게든 감추겠다고 며칠이나 가시를 세우고 알량한 자존심이나 부렸던 내 비겁했던 시간들.
그 모든 폭력적인 순간들을 고스란히 다 겪고도, 이 미련한 사내는 그저 내가 퇴근하고 무사히 자기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듯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다.
"흑..."
나도 모르게 잇새로 억눌린 울음이 터져 나왔다.
"형님...?"
품 안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과 물기에 놀란 병운이 내 어깨를 떼어내려 했지만, 나는 녀석의 허리에 감은 팔에 더 강하게 힘을 주며 녀석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깊숙이 파묻었다.
"병운아... 형이 미안해..."
한 번 터진 눈물은 수치심마저 집어삼킨 채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내 걷잡을 수 없는 눈물과 뜨거운 숨결이 녀석의 얇은 면 티셔츠를 순식간에 축축하게 적셨다.
"흐으어어어엉 내가 다 미안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 끔찍한 바다로 끌고 가서 미안하고... 다친 상처 지독하게 후벼 파서 미안하고... 쓸데없이 자존심 부리고 도망쳐서 미안해."
"아이고, 형님. 웁니까? 왜, 왜 이러십서. 예? 누가 학원에서 형님 괴롭혔수까?"
당황한 녀석의 커다란 두 손이 허공에서 갈 곳을 잃고 허둥지둥 허우적거렸다. 내 잘못으로 우는 건데, 이 바보 같은 곰탱이는 내가 밖에서 무슨 험한 일이라도 당하고 온 줄 알고 사색이 되어 쩔쩔매고 있었다. 그 무구하고 바보 같은 다정함이 내 가슴을 기어이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넌 진짜... 흐흑, 왜 이렇게 착해 빠졌어. 왜 이렇게 미련해, 응? 임마... 내가 안 미워?"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며 녀석의 단단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아프지 않게 손바닥으로 통통 내리쳤다. 그제야 내가 우는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챈 건지, 허공을 맴돌던 병운의 커다란 두 손이 천천히 내려와 내 떨리는 등을 둥글고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괜찮수다... 다 괜찮수다, 형님."
투박하고 두꺼운 손바닥이 일정한 박자로 내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기 시작했다.
"형님이 이렇게 내 옆에 있어 주는데...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수까. 울지 마십서... 형님 펑펑 우니까, 내 억장이 다 무너지려고 한단 말입니다..."
물기 어린 녀석의 애틋한 위로가 귓가에 닿을 때마다, 나는 그 거대하고 따뜻한 바다에 완전히 침몰한 채 오래도록 참아왔던 눈물을 남김없이 쏟아냈다. 평생을 남들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살아왔던 갓 마흔이 된 찌질하고 서툰 어른은, 그날 그렇게 강병운이라는 안식처 안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우는 법을 배웠다.
